[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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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내가 진심을 토로했다.

-사실은 말야, 나는 정서가 말라붙은 모양이야. 어떻게 된 게 그런 단어의 발음만 들려도 볼따구니가 근질거리고 소름이 돋아.

어쨌든 제목은 '봄비'로 하자고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었다. 누구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거나, 또 어떤 놈은 창 문턱에 팔을 괴고 비 내리는 감자밭을 내다보거나, 또 누구는 남이 뭘 쓰나 넘겨다보면 그놈은 잔뜩 한 손으로 제가 써놓은 것을 가리면서 키들거렸다. 심사위원은 방의 주인인 대진이가 하기로 결정되었다.

-자아, 그마안.

하면서 그가 시험 답안지 걷듯이 아이들에게서 노트장들을 빼앗아 갔다. 대진이는 심드렁하게 한 장씩 들쳐보더니 콧바람 소리를 냈다.

-흥, 내 그럴 줄 알았지.

그가 어느 대목을 읽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모두들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장본인이었던 성진이가 중국 무협영화에서처럼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면서 애걸했다.

-제발 그쳐다오. 남의 입을 빌려서 들으니까 더욱 추악하구만.

대진이가 조용해지더니 누군가의 노트장을 민기에게 넘겨주었다.

-봐라, 얼마나 으젓하냐? 이런 건 소리내서 읽는게 아냐. 각자가 알아서 속으로 읽어봐라.

차례로 그것을 돌려 읽어 보았다. 역시 한결같은 침묵. 모두들 자기가 쓴 것들을 뭉개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봄비,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대진이가 다시 집어다가 흔들어 보이면서 우리에게 물었다.

-이걸 장원으로 뽑는 데 반대하는 놈… 없겠지?

모두들 침묵. 그러니 그게 장원으로 결정이 되었다. 작자는 현일이었다. 민기가 말했다.

-시를 쓰려고 하지 않은 시다.

나도 말했다.

-찬성. 그러니까 시에 대해서 좆도 모를 수록 시가 된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는 현상이 아닌 것이 없다. 실제로 저 이슬비는 감자의 잎사귀에 물기나 번질 뿐이며 이맘때 내리는 비가 대충 그렇다. 봄비와 감자밭은 정서적으로 서로 충돌한다. 나를 울려주는 아하, 봄비 같은 따위는 없다. 그러나 여린 잎사귀를 간질이는 작은 물방울의 감촉이 시적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우리 젊은 것들의 봄비로 추상화된 감성이야말로 얼마나 부족하고 삶에 못 미치는 것이겠는가. 봄비는 그저 작은 물기이며 감자밭조차도 적시지 못하는구나. 우리가 바랐던 것은 이렇게 으젓한 '표현'이었다. 우리가 문예적 태도에서 벗어나거나 비켜서려고 했던 것은 이런 식이었다. 결국은 나 혼자만 글 쓰는 일을 천직으로 삼게 되고 모두들 심드렁해져서 저 먹고 살길로 각자 흩어져 갔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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