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에서 천더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드로잉(drawing)이다. 작가가 본격 작품 제작을 위해 어림잡아 그려보는 최초의 밑그림이자 설계도이기에 번득이는 직관이 엿보이는 중요 자료지만 시장성이 없는 탓에 홀대 받는다. 작가 역량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기초 공사란 뜻에서 화골(畵骨)이라 부르기도 한다.
설치미술가 이불씨의 작품 설계도라 할 드로잉 180여 점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장 광경. ‘나의 거대한 서사’ 연작(왼쪽 설치물)을 위한 드로잉이 뒤쪽 벽에 선보이고 있다. [PKM 트리니티 갤러리 제공]
이불씨는 드로잉을 “떠오른 아이디어나 환상을 나 자신이 기억하기 위해서 시시콜콜 메모 형식으로 적어가는 조형 메모”라 정의했다. 드로잉 여백에는 작품의 재료나 당시 기분, 더 전개해나가야 할 암호 같은 제시어가 적혀있다. 그는 지난 5년 여 “가족을 희생해가며” 무지막지 작업에만 매달렸는데도 이중 작품으로 완성된 건 채 10%가 안 된다고 털어놨다. 원대한 구상과 현실 사이의 틈은 그를 힘들게 하지만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일에 흥미가 있다, 난 아직 게으르다”는 말은 ‘설치미술의 여전사’란 그의 별명을 떠오르게 한다.
드로잉은 그가 2005년부터 집중해 파들어간 ‘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큰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거대한 서사’가 불가능해진 이 쪼그라든 시대에 다시금 거대한 서사를 말하는 그의 배짱은 어디서 오는 걸까. 공중에 떠 있는 수정도시, 거대한 풍선이 방을 꽉 채운 판타지, 우주에 흐르는 암석 덩어리를 감싸버린 조형물 등 그의 통 큰 상상력이 드로잉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이씨는 내년 11월부터 지난 20여 년 작업을 망라하는 회고전을 연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출발해 캐나다 밴쿠버미술관, 미국 뉴욕 브루클린미술관 등을 거쳐 한국에서 마무리하는 3년 프로젝트다. 출품된 드로잉들은 그가 3년을 버틸 수 있는 양식인 셈이다. 전시는 10월 15일까지. 02-515-9496.
정재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