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승부가 시원해요" 소녀장사들 씨름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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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밑 3cm의 단발머리. 예쁘게 차려입은 교복. 오후 4시, 수업이 끝난 한 소녀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용인의 한 씨름장. 앳된 얼굴의 소녀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채 풀리기도 전, 어느새 씨름장에는 어린 소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평일 저녁 7시, 용인 종합운동장 씨름장에서는 여자 씨름선수들의 훈련이 이뤄진다. 씨름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작은 동호회가 이제는 전국대회에서 큰 성과를 올릴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단발머리 소녀들이다.

현재 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김은별(15·모현중3)양은 씨름을 시작한지 갓 두 달된 '초보선수'이다. 초보라고 얕보면 큰일난다. 김양은 지난 5일, 전남 구례에서 열린 여자천하장사 대회 60kg이하 체급에서 8강까지 올랐다. 김양은 원래 태권도선수였다. 도 대표로 출전해 입상할 정도로 각광받던 유망주였던 그녀가 씨름선수로 전향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씨름은 한번에 승부가 나잖아요. 속시원해서 좋아요." 짧고 굵은 대답이다. 그렇다면 한판 승부가 가능한 많고 많은 운동 중에, 그것도 여자가, 씨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반대로, 여자가 씨름을 하면 안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당찬 반문이 돌아왔다. 하지만 김양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취재진의 손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한 김양은 "엄마가 씨름을 못하게 해요. 계속하면 다리를 부러뜨린다는데..."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우울함도 잠시, 금세 눈빛이 변하더니 "다리 부러져도 깁스하고 오면 되죠 뭐!"라며 씩씩함을 내비쳤다.

그에 반해 김은지(15·백암중3)양은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오히려 어머니의 등살에 떠밀려 처음 샅바를 잡았기 때문이다. 운동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라는 어머니의 지시였다. 실제로 김양의 어머니는 훈련장까지 직접 찾아와 딸의 운동모습을 지켜보며 코치를 하기도 했다. 김양은 "다같이 몸을 부딪히면서 즐겁게 운동하니깐 살도 더 잘 빠지는 것 같아요"라며 웃어보였다.

그런가 하면 씨름을 하기 위해 전학까지 불사른(?) 열성파도 있다. 이승아(15·장호원중3)양은 충북 무극중학교 재학 시절, 우연히 TV에서 중계되는 여자씨름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힘이 아닌 기술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게 씨름의 묘미"라고 말하는 이양은 여자씨름이 활성화된 용인으로 오기 위해 부모님을 설득했고, 결국 지금의 학교로 전학을 왔다.

불과 몇 년전, 여자씨름은 '아줌마'들의 명절맞이 놀이, 혹은 TV 속 연예인들의 놀이수단 중 하나일 뿐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놀이'가 '스포츠'로 자리잡아 다수의 여성들이 씨름판으로 나서고 있다. 선수등록을 통해 프로로 활동하는 남자씨름과는 달리 여자씨름은 모든 선수가 아마추어로 활동한다. 그로 인해 정확한 선수현황은 가늠하기 힘들지만 전국적으로 약 2000여명 정도가 활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중·고등학생의 비율은 약 20%로 400여명에 달한다.

전국 씨름연합회 이정한 과장은 "중고생등 젊은 선수들의 등장으로 여자 씨름판에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며 "앞으로 각 시군에 실업팀을 만들어 여자씨름의 저변을 더욱 넓혀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는 30일, 전남 남원에서는 제3회 大천하장사 씨름대회가 개최된다. '남성의 영역'인 씨름판으로 뛰어든 여성들. 금기와 편견을 깨고 성(姓)벽을 허무는 그녀들의 도전에 다가올 모래판은 활기로 넘쳐날 예정이다.

이병구 기자·유혜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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