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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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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호 03면

올 6월 미국 뉴욕주 서펀에서 열린 방씨 가족 수련회 기념 사진. 방씨의 조부 아래 7세손까지 모두 130명이 모여 가족모임이란 말대신 ‘수련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6월 28일 미국 뉴욕 북쪽 서펀이란 작은 마을의 홀리데이인 호텔에 한국인 130명이 모였다. 이들은 30일까지 2박3일 동안 하늘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오리엔테이션·특강·골프대회·새벽기도·예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언뜻 봐선 여느 한인교회 수련회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이 행사는 교회 수련회가 아니라 ‘가족 수련회’다. 티셔츠에는 큰 나무 그림 옆에 ‘the Pang Family’(방씨네)란 글이, 행사장 플래카드엔 ‘Retreat for the Descendants of Father manjoon Pang’(방만준 할아버지 후손 수련회)란 글이 쓰여 있었다.

100번째 추석 맞는 개신교 최고 어른 방지일 목사의 삶과 꿈

방지일 목사는 10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시간30분이 걸린 인터뷰 내내 활기찼다. 신동연 기자

모임의 주인공은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100세(1911년생)를 맞은 방지일 영등포교회 원로 목사. 방 목사의 할아버지 방만준씨의 후손 중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집안 최고 어른인 방 목사의 100세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방 목사의 조부로부터 7세손까지 이어지다 보니 가족 모임이라고 하기엔 워낙 대규모라 ‘모임’ 대신 ‘수련회’란 말을 사용했다. 수련회는 다른 호텔의 일반 모임과 마찬가지로 ‘등록’과 ‘이름표 배부’로 시작했다. 130명이나 되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라, 서로 얼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130명 미국 가족 중엔 목사 20명, 장로 16명, 권사 16명, 의사 17명, 교수 13명, 판사 2명, 회계사 3명이다. ‘속세’와 ‘종교계’ 어느 쪽 기준이든 복받은 집안이다.

중앙SUNDAY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방 목사를 만났다. 그는 한국 개신교계의 ‘최고 어른’이다. 일제 치하인 1937년 평양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으니 올해로 74년째다. 방 목사의 일생은 한국 개신교는 물론 한민족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부 방만준씨는 한국 개신교의 1세대다. ‘제사 안 지내는 예수쟁이’라는 핍박을 받아 고향(평북 선천) 마을을 떠나야 했다. 부친 방효원씨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목사가 된 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방지일 목사는 신학생 시절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아가며 성경 모임을 만들고, 교회를 세웠다. 1937년,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다. 중일전쟁 뒤 중국 땅에서도 일제의 문화·종교 정책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방 목사에겐 감시와 핍박이 계속됐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이번엔 공산당의 감시와 통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당시 심정을 ‘어항 속 물고기’라고 표현했다. 방 목사는 서구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중국 땅에서 유일하게 남은 외국 선교사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방 목사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다행히 당시 서구 언론에 ‘공산 중국 땅에 마지막 남은 외국 선교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957년 간신히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1979년까지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요즘 서울 등촌동의 한 시니어타운에서 홀로 살고 있다. 부인은 6년 전 세상을 먼저 떴다. 자녀는 모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방 목사는 그간 시무해온 영등포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교회에서 가까운 시니어타운이다. 방 목사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또 다른 원로 목사가 있다. 2005년 영등포교회 담임목사직을 은퇴한 김승옥 목사다. 김 목사도 고희를 넘긴 71세지만, 아버지뻘인 방 목사를 모시느라 항상 ‘젊게’ 살 수밖에 없다. 김 목사는 방 목사의 후임 담임목사였다. 지난 10일 오전 10시 인터뷰 때도 먼저 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들 같으면 대접받을 연세에 더 원로인 목사님을 수행하시느라 힘드시겠다”고 하자 김 목사는 준비된 듯 거침없이 답했다. “제가 도리어 영광입니다. 방 목사님과 같이 다니니 더불어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방지일 목사 기념사업회’의 부이사장이기도 하다.

올해 100세의 방 목사는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와 지팡이를 번갈아 사용하긴 하지만 나이에 비해 무척 건강했다. 기자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 목사는 아직도 남아 있는 평안도 억양으로 ‘쩌렁쩌렁’ 답했다.

71세 김승옥 원로목사가 수행
-건강 비결이 뭡니까.
“없어요. 막 살아요. 있는 대로 주는 대로 먹습니다.”
옆에서 김 목사가 부연 설명했다. 고기와 채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는데 일반인과 비교하면 아주 적게 먹는다고 한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 꾸준히 해오신 운동이라도 있으실 텐데요.
“없어요. 젊어서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었어요. 나이 들어서는 매일 새벽 일어나서 욕조에 물 조금 받아두고 발로 바닥을 치는 것을 한 시간 정도 하는데 운동이라면 그게 운동입니다.”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10시에 잠들어 오전 2~3시에 일어납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이어서 기도와 성경 외우기를 합니다. 4년 전만 하더라도 교회 새벽기도에도 갔는데 이젠 혼자서 가긴 힘들어요. 식사 시간인 오전 7시가 되기 전까지 e-메일도 체크하고 답장도 보냅니다. 책도 읽고요. 그러다 졸리면 한숨 붙이기도 하죠. 낮엔 사방에서 오라는 데가 많아서 별로 쉴 틈이 없어요. 그렇게 하루가 갑니다.”

100세 노인은 매일 e-메일을 쓴다. 인생 90년 동안은 e-메일이라는 걸 상상도 못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선교사·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데 e-메일만큼 편한 게 없다고 한다. e-메일로 누군가에게서 좋은 사진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퍼나르기’도 한다. 방 목사는 아침 식사 전까지 매일 1~2시간을 인터넷으로 세계를 누빈다며 컴퓨터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웹메일을 확인하려고 비밀번호를 넣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김 목사, 이거 왜 안 되죠? 새벽까지만 해도 됐는데?” “어, 그러게요. 목사님,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머리가 허연 두 원로 목사가 컴퓨터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전히 설교나 강연을 하신다면서요.
“바빠요. 월요일엔 여기서 목사님들 모아놓고 성경 공부하고, 수요일엔 도곡동에 가서 4시간 동안 성경 강의합니다. 목요일엔 어린이 선교회 사무실에 가서 또 성경 공부를 합니다.”

여기까지는 매주 공식 스케줄이다. 사실 방 목사가 쉬는 날은 없다. 화·금·토·일, 어느 날이라도 각종 초청 강연 등으로 일정이 빡빡하다. 이날 약속된 1시간30분 인터뷰도 여유가 없었다. 끝날 시간이 되자 다른 손님들이 벌써 소파에 앉아 방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드시지 않나요.
“괜찮아요. 녹스는 게 두려울 뿐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아요.” 북녘 땅과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해온 방 목사 평생 삶의 신조다.

-최근 우리나라 사회에서 개신교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습니다. 원로의 입장에서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진단한다면.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100년을 넘겼어요. 과거 초기엔 가정과 사회에서 박해를 받아가며 교회를 다녔는데, 요즘은 너무도 편해졌습니다(교인들이 너무 안일하고 나태해졌다는 뜻). 교파도 너무 많이 갈라졌죠.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장로교가 하나였는데. 신앙의 차이라기보다는 자리 다툼의 성격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 개신교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이만큼 발전한 데는 교회가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의 본령은 사회공헌이나 복지사업이 아니라 속죄구령(贖罪救靈·죄를 면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신교는 그간 어느 단체보다 사회의 복지사업에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부정적인 모습만 가지고 전체 개신교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어두운 밖에서 보면 밝은 집안의 시시콜콜한 모습까지 모두 보이는 법입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정반합(正反合)을 얘기한
헤겔의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면 될 겁니다.”

-개신교 최고 원로 목사로서,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그걸 왜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말합니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개인에게 해야지. 공개적인 방법으로 충고하는 건 아주 나쁜 일입니다. 내가 대통령과 같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장점을 칭찬하고 격려해줄 겁니다.” 실제로 그는 종종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다. 이 대통령이 속한 교회와 같은 교단이어서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잘 알던 사이이기도 하다.

6년 전 부인과 사별, 시니어타운서 생활
-추석 때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식 걱정이 첫째 화제입니다. 요즘 청년 실업이 심각한데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업을 못 구한 청년들, 그런 젊은이들을 뒷바라지한 부모들, 모두 안타깝습니다. 청년 실업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죠. 서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지만 현실이 어렵다고 한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인데, 외국인 노동자는 왜 이리 넘쳐납니까. 우리 청년들, 배운 게 많다고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벼가 추수를 맞을 때까진 태풍에 쓰러지고 꺾이는 시련을 겪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놀아서는 안 됩니다.”

-그간 살아오신 100세 평생을 스스로 평가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는데 여전히 부스러기가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괴롭고 가슴 아팠던 일도 있었을 텐데요.
“가슴 아팠던 일이라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겁니다. 중국 선교를 할 때 일본 사람들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 나를 무던히도 어렵게 했습니다.”
중일전쟁 후 일본의 중국 지배가 본격화했을 당시의 일이다. 일제는 중국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의 하나로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수십 명의 일본인 목사를 중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선교사업이 여의치 않자 ‘내선일체’를 구실로 방 목사를 찾아와 자신들의 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방 목사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인 목사들은 방 목사를 비롯한 한국인 선교사들을 비방하고 고발하기까지 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공산 치하의 중국에서 선교하던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나를 어렵게 했지만 중국 공산당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공산당은 우리를 무섭게 핍박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엔 공산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 경험해본 나는 잘 압니다. 이 사람들 치밀하면서 무서워요.”

인터뷰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방 목사가 취재진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거~, 교회 다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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