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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통일비용 축소 위한 제3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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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막대한 통일비용을 사전에 감소시킬 방안은 없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통일비용 중에서 중요한 항목은 남북한 국민의 생활 수준의 차이를 줄이기 위한 비용이다. 특히 북한에서 빈곤 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의 소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본 자산, 즉 교육·보건·위생·주택 등 인력과 사회개발에 드는 비용이다. 직접 고용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발전이나 사회간접자본의 투자에 드는 비용도 중요하다.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한 재원은 이미 외국의 인도적 원조나 남북경제협력을 통해 제공돼왔다. 문제는 이러한 활동이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통일비용의 축소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북경협 액수는 더 늘어나야겠지만, 지금까지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2004~2007년 남북경제협력기금을 통해 매년 북한에 제공한 경협액은 한국이 130 여 개의 개발도상국에 제공하는 원조액을 능가했다. 매년 평균 6억 달러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남북경협의 효과가 가시적이지 않는 것은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에 제공하는 경협은 국제기준에 맞는 원조원칙이나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경협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합의를 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합의한 사항도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거나 위반되는 경우도 많았다. 최근 개성공단에 입주한 사업주들의 어려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수해복구를 위한 긴급지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비효율적인 통일비용 축소활동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됐다. 남북한 간 협의를 통해선 경협이나 인도적 원조 같은 통일비용 축소활동이 효율적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다.

우리는 통일비용 축소를 위한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다자(多者)간 또는 국제개발금융기관을 통한 원조나 경협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안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간 양자회담을 하지 않고, 6자회담을 개최하는 것과 같다. 다자간 원조를 실시하면 북한도 남한과의 감정적 대립을 줄이고, 정부의 위신 때문에 일방적으로 협약을 파기하거나 위반하는 사례를 줄일 것이다. 또 여러 나라가 참여하기 때문에 협약을 수용하고 준수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가 참여하면 통일비용을 축소하기 위한 개발원조의 범위와 금액도 확대될 수 있다. 한국이 북한의 개발을 위한 신탁기금에 출연하면 다른 이해관계국들도 참여할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기구에 북한의 개발원조를 위한 다자신탁기금을 설치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 현재 수많은 개도국의 개발을 위해 국제개발금융기관에 9개의 신탁기금을 설치하고 총 2억 달러를 출연하고 있다. 다른 개도국을 위해서도 설치하는 신탁기금을 한국과 이해관계가 가장 긴밀한 북한을 위해 설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탁기금에 대한 출연은 반드시 현금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남아도는 쌀을 현물로 신탁기금에 기탁할 수도 있다.

북한이 아직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자신탁기금을 수혜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동티모르 등의 국가도 국제개발금융기구의 회원이 되기 전에 외교적·정치적 이유로 직접 원조를 받지 못하고 세계은행에 설치된 다자신탁기금을 통해 개발원조를 받았다. 북한은 이미 국제개발금융기구 가입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능성과 절차를 타진한 바 있다. 북한의 개발을 위한 다자신탁기금의 설치는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개발금융기구에 가입하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이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유도해 국제사회가 통일비용을 분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계우 한국외대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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