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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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때에는 어른이나 애들이나 별로 갈 데가 마땅치 않던 시절이었다. 청춘 남녀가 모처럼 데이트한다고 시내에 나와봤자 다방에서 만나고 영화를 함께 보고나서 중국집에서 식사하면 호화판인 셈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마저 넉넉지 않아 하루 온종일을 내쫓지 않는 고전음악실에서 죽치다가 누군가가 저녁나절에 막걸리라도 사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고등학생짜리였던 우리가 오죽했겠는가. 동화에 들렀더니 성진이가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내게 말했다.

-택이가 한 잔 산다고 그랬다.

학교도 때려치운 택이가 무슨 재주로 술 사고 밥 사고 한다는 말이냐고 그랬더니 글쎄 두고 보란다. 날이 저물어서야 휴학 중인 상득이도 나타나고 이미 대학생이 된 우석이도 가정교사 일을 끝내고 들렀다. 우리는 아직도 거리 요소마다 총검을 치켜든 군인들이 서있고 개구리 위장복 차림의 공수부대 군인들이 벌겋게 취해 명동의 선술집들을 점거하고 있더라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쨌든 생각이 제법 돌아가던 우리로서는 기분이 저조했던 게 사실이었다. 드디어 택이가 검게 물들인 작업복에 군데군데 허연 시멘트 가루를 잔뜩 묻힌 꼴로 나타났다.

-어때 할 만하냐?

-너희 노동에 지친 잠이 얼마나 달콤한 건지 모를 거다. 이 백면서생 놈들아.

-위장병 고치려고 김매는 도련님도 있다더니.

택이는 그 무렵에 대외 원조로 짓기 시작한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 기초 공사장에 나다닌다고 했다. 그는 목덜미에 땀냄새가 지독한 수건까지 두르고 있었다. 모두 공원 빈터 주위로 빙 돌아가며 생겨난 선술집으로 몰려갔고 택이가 간조로 받은 몇 푼으로 막걸리 서너 되를 사고나서 역시 부잣집 아들인 상득이가 본격적으로 밥이네 술이네를 낼 판이었다. 모두 술이 거나해졌을 때 택이가 내게 말했다.

-너 정말 학교 다닐 셈이냐?

-글쎄 어머니 때문에 때려치울 수도 없고. 다니자니 더럽고 그래.

대학생 우석이가 택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잖아도 너하고 놀다 낙제까지 했는데, 왜 학교 다니는 앨 꼬이느냐?

-그냥 놔두기 아까워서 그런다. 쟤 저렇게 나가다 이담에 뭐가 되겠냐?

상득이와 성진이는 모두 일단 휴학계를 낸 형편이었으니까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들은 제각기 말했다.

-얘는 작가가 될 테니까 스스로 개척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제 겨우 덫에서 풀려난 거야. 언덕 너머에 자유의 대초원이 널려 있다고.

택이가 다시 말했다.

-나는 내일 산으로 들어갈 거다. 보아둔 데가 있어.

-어느 산에를 간다는 거야. 설악산, 지리산?

택이는 우석이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먼 데는 오히려 안 좋아. 서울 근방이 낫지. 근사한 동굴이 있어. 책 싸들고 들어가서 실컷 읽고, 그리고 나도 뭣 좀 써보련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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