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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알고, 나를 알리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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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몇 년 전에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스타 검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인터넷에서 하루에 2000만건씩 다운로드됐다. 그런데도 서점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내용을 담은 '스타 보고서'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쌓아 두고 팔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내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 그 책을 사서 읽었다.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발 지진이 되어 해일처럼 한반도를 강타한 뒤에는 'X파일 디바이드'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자신의 힘으로 인터넷에서 이 파일을 찾을 수 있는 사람과 못 찾는 사람의 격차를 뜻한다. 디지털 정보 시대에 생기는 '정보 격차(Digital Divide)'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다. 호기심과 인권 사이에서 연예인과 기획사, 광고회사, 일부 언론은 타격을 받았다.

인터넷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쉽게 풀어 준다. 인터넷을 통해 소문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아내는 것은 쉽다. 기사 밑에 달린 댓글만 읽어 보면 알게 된다. 인터넷의 무한 확장성을 타고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댓글에서 할 말과 못 할 말의 구분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즉각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은 자신을 알리고 싶은 욕구도 넘칠 정도로 충족시켜 준다. 인터넷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이 매니어'들은 일기장도 올리고 성적표도 공개한다. 여자친구 사진을 올려 불특정 다수에게 평가해 달라고도 한다. 미니홈페이지 방문자 수로 자신의 인기도를 매일 점검한다.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싶어하고, 인간적인 진솔함이라는 이름 아래 드러내기의 미학을 실천한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알고 싶어할지는 별문제다. 자기 표현에 우리보다 관대한 서구에서보다 노출의 수위는 더 높아 보인다.

인터넷에서 주목받는 이슈는 주로 감성적인 면을 자극하는 내용이 많다. 물론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부실 도시락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퍼져나간 생생한 한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을까. 반면 부작용도 크다. 인터넷에서 중요한 뉴스를 판단하는 기준은 클릭 수와 댓글 수가 되었다. 많이 본다고 중요한 뉴스는 아닐 텐데 공익적인 뉴스보다는 가벼운 화젯거리가 늘 상위를 차지한다.

인터넷에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잠깐 올린 글도 여러 곳에 퍼져나가면서 태풍이 될 수 있다. 신문사 기자가 블로그에서 여성 아나운서를 비하했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글을 쓴 사람은 블로그를 사적 영역으로 생각했지만 방문자들은 공적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인터넷에서는 어디까지가 개인의 일기장이고 어디서부터가 공적인 인터넷 매체인지에 대한 구별도 모호하다. 인터넷의 무한 확장성과 자기 복제성 때문에 사적 영역은 줄어든다. 사적 영역인가, 공적 영역인가는 이제 생산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결정한다.

수평적 의사소통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생활을 엿보는 것이 일종의 오락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너를 알고, 나를 알리는 것은 좋다.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많은 것을 알리고 싶은 욕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줘가면서까지 너를 알고 싶고, 나를 알릴 수는 없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에 대한 예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문화가 달라져도 서로에 대한 배려는 기본이다. 모르는 사람이나 불특정 다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자유를 앞세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될 일이다.

강미은 숙명여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