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 과학] 그림 속 흰눈이 유독 하얀 까닭 … “종이에 규소 입힌 뒤 그렸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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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설송도, 종이에 먹, 117.0×53.0㎝. 종이의 바탕에 무언가를 두껍게 덧바른 후 엷은 먹으로 그렸다. 소나무 가지 주변에 먹을 가하지 않고 남겨둔 부분이 자연스럽게 눈처럼 보이게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후기 서화가 이인상(1710~1760)은 문인화가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그는 조선 4대 명문가로 꼽히는 백강 이경여(1585~1657) 가문의 후손이다. 대제학·영의정·우의정을 배출한 명문가다. 그러나 이인상의 증조부가 서얼이었기에 그 역시 서출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조와 절개 있는 청렴한 선비로서 존경 받았다.

소나무를 즐겨 그린 그의 작품 중에서도 ‘설송도(雪松圖)’가 독보적이다. 첫째,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와 가로로 휘어진 소나무 두 그루가 교차하는 그림이 담고 있는 철학 때문이다. 곧은 나무는 올곧은 성품과 선비의 지조를, 휘어진 소나무는 신분의 제약과 유민의식 등의 한계를 표현한다. ‘설송도’는 좌절된 현실에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자세를 그려냈다.

또 하나 그림이 주목 받는 이유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흰 눈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흰색은 여백, 즉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종이 그대로의 색이다. 그렇다면 겨울 풍경을 그릴 때 바탕보다 더 희어야 마땅할 눈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눈이 없는 부분에 먹을 가해서 상대적으로 눈 내린 부분이 더 희어 보이게 하는 기법을 쓴다”며 “설송도 역시 바탕에 회색을 칠해 눈 부분이 더 희어 보이게 한 것은 동일한데,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종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희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는 종이와는 달리 세월의 힘을 이겨낼 만큼 흰 눈에는 과학적 비밀이 숨어있었음이 박물관의 조사 결과 드러났다. 휴대용 형광 X선 분석기(XRF)로 검사하자 백토(白土)에 많이 들어있는 규소(Si) 성분이 여느 동양화에 비해 유난히 많이 검출된 것이다. 민 학예연구사는 “종이에 규소 성분이 들어간 무언가를 입힌 다음 먹을 썼으리라 추정된다”며 “동양화에서 이런 기법이 사용된 사실이 확인된 예는 없다”고 말했다.

이덕무(1741~1793)의 시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이인상이 그림을 그릴 때 분지법(粉紙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쌀가루를 탄 물에 종이를 적셔 다듬질하여 종이 빛을 맑고 깨끗해 보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소는 쌀에 들어있는 성분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인상이 종이를 백토 가루에 적시는 것을 보고 쌀가루라 생각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설송도’를 비롯한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 20여 점은 14일부터 12월 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회화실에서 전시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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