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9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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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어머니는 며칠 동안 벼르다가 고백한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뒷날에 우리는 다시 그때의 일을 서로 얘기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간 이후 처음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 너는 애도 어른도 아닌 나이였어. 누나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내 애들은 사춘기가 되면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더구나.

새 학년이 되어 다른 애들은 모두 진급을 했지만 나는 하급반 교실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그때의 굴욕감과 좌절감은 동네에서 버스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학교에 가서도 얼굴에 뭔가 흉측한 것이 묻었거나 마치 몹쓸 병에라도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몇 달 동안의 악몽은 이후 내 젊은 날을 크게 지배했다. 나는 온전한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낙오된 나는 황야의 거친 바람을 당연히 각오해야 될 것 같았다.

그때는 오월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변화가 올 적마다 오월을 전후해서 일어났으므로 스스로나 친구들이 내 일종의 출분을 '오월 위기설'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앞에서 나왔듯이 우리는 그때 영등포를 떠나 상도동으로 집 짓고 이사를 했다. 사월인가에 삼각지에 사는 어머니의 오촌 당숙이 식구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어간 일이 있었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고 무슨 복음파 교회에 다녔는데 큰일이 있을 거라고 한강을 넘어와서 밤을 지내야 한다고 우리 집을 찾았던 거였다. 4.19 이후의 일년도 못되는 민주당 정권 시절은 전쟁 직후라 지금보다도 기득권 세력의 힘이 막강할 때였고, 처음 해보는 민주주의라 날마다 시위에 혼란스런 나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두고 봐라 이제 큰 난리가 난다…'라고 수군수군 소문이 퍼져 나갔다. 드디어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날 새벽에 우리 동네서 가까운 한강교 언저리에서 밤새껏 총성이 울리더니 새벽부터 라디오 방송이 정변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까지 학교에 나갔으므로 그날도 버스를 타고 등교 길에 시내를 지나갔다. 곳곳에 탱크가 서있었고 무장한 군인들이 요소의 건물이나 가로를 지키고 있었다. 광길이와 나는 점심 시간에 꾀꼬리 동산에 앉아서 시국 얘기를 했다. 일반 시민들은 뭔지 모르고 차라리 잘 되었다, 무능한 민주당이 잘도 넘어갔다고 하지만, 총칼로 권력을 잡으면 앞으로도 국민을 그것으로 억누를 거라고 서로 말했다. 당시에 택이는 이미 지난 겨울 무렵부터 학교를 때려치웠고 성진이 상득이 등도 휴학계를 내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쿠데타 나고 한 일주일 지나서 '동화'엘 들렀다. 성진이가 날마다 거기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진이네는 드디어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가 어린 동생을 낳으면서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고 어머니는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러니 그는 갈 곳이 없어져버린 셈이었다. '동화'의 주인은 혼자된 할머니였는데 원래 수천장의 클래식 레코드 판들은 그녀의 남편이 동경에서부터 모아온 것들이었다. 그녀가 어찌나 구두쇠고 잔소리가 많은지 우리는 별명을 '노랑괭이'라고 불렀다. 노랭이라는 말에다 생김새가 의심 많은 고양이 같다고 하여 붙인 별명이다. 성진이는 '동화'의 판돌이로 취직을 했다. 노랑괭이가 성진이의 처지를 알고 월급은 없이 약간의 용돈에 숙식만 제공하는 조건으로 고용했다는 것이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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