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치고 볶다 조선 간장으로 간 맞추면 감칠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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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10면

인간 세상 어디나 그렇듯, 음식 문화에도 편견과 권력은 존재한다. 누구의 음식 취향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문화적 맥락이 부여되고 사회적 권력관계와 연결되면, 이런 편견과 권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에 가장 애착을 갖게 마련이고, 다른 문화에 배타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기도 한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26> 들깨가루 듬뿍 넣은 고구마 순 볶음

지금 생각해 보면 힘없는 며느리였던 엄마의 음식 취향은 가끔 놀림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구마 순이었다.

전라북도 출신인 엄마는, 개성 출신으로 오랫동안 서울살이를 한 아버지와 결혼했다. 전북은 입맛으로는 둘째 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맛깔 난 음식이 풍부한 지방이고 게다가 외할머니가 전주 출신이니 엄마의 음식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개성 또한 만만치 않은 곳이다. 입는 것은 소박하면서도 오로지 먹는 것에만은 목숨 거는 사람들이 개성 사람들이다. 그 자존심은 또 오죽한가. 전국에서 ‘서울에 올라간다’ 하지 않고 ‘서울에 내려간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개성 출신뿐이다.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음식 취향은 꽤 달라 엄마는 시집 온 후 시댁의 입맛에 맞추려 꽤나 노력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당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해먹으려 했을 것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고구마 순을 사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그런 시도였다. 친정 고향집에서 여름에 해먹던 고구마 순이니, 시집살이 하던 며느리로서는 꽤나 먹고 싶었을 것이다.

시장에서 자줏빛 껍질과 이파리를 단 고구마 순을 한 단 사가지고 오면 손 달린 여자들은 다 나와서 껍질을 벗겨야 한다. 손은 바쁘지만 입은 별로 할 일이 없으니 툇마루에 앉아 고구마 순을 다듬으며 한마디씩 한다. “고구마 줄기는 소나 먹이는 건 줄 알았는데 아랫녘에서는 이걸 사람이 먹더라고” 하고 할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면, 휴일 툇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던 아버지도 “그렇지, 소나 먹였지”하고 맞장구를 쳤다. 무시나 비웃음의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가족 내 권력관계에서 가장 힘없는 며느리, 그것도 지방 출신에게 하는 말이니 확실히 이 발언은 권력적임이 분명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듣는 엄마는 적잖이 불쾌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 착한 엄마는 늘 깔깔 웃고 넘겼다.

중부 이북 사람들이 고구마 순을 먹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였다. 전쟁으로 사람이 뒤엉키고 산업화로 남부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서울의 시장에서도 고구마 순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전쟁 때 이야기로 이어가셨다. 부산 피란 시절, 시장에서 고사리나 고비 말린 것처럼 생긴 나물을 사온 적이 있었더란다. 그런데 아무리 삶고 또 삶아도 계속 질기기만 하고, 게다가 고사리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더란다. 도대체 이게 정체가 뭘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먹지 못하고 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고구마 순 말린 것이었다. 소나 먹이는 고구마 순이 이렇게 시장에 나올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종종 피란 시절 경상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억울한 일들을 이야기하곤 하셨는데, 고구마 순과 관련된 발언들을 죽 엮어서 생각해 보면 그때 억울함이 엉뚱하게도 전라도 출신 엄마의 입맛을 비웃는 방식으로 튀어버린 것 같다.

자줏빛 껍질을 깨끗이 벗겨 연둣빛이 된 고구마 순을 뜨거운 물에 데친 후 볶는다. 엄마가 해준 가장 맛있는 조리법은 생들깨를 갈아 거른 걸쭉한 들깨 물을 붓고 볶는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토란이나 머윗대도 들깨를 넣어 볶거나 끓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그런 방식이다.

요즘 집에서 해먹기에는 다소 손이 많이 가는 방법이라 나는 그냥 간략한 방법을 쓴다. 껍질 벗긴 들깨가루 파는 것을 사다 놓고 데친 고구마 순을 기름에 볶다가 이것을 듬뿍 넣는다. 들깨가루를 넣을 때에는 조선 간장으로 간을 하고 마늘 넣고 물을 자작자작하게 부은 후 뚜껑을 덮어 한 김 올린다는 느낌으로 약한 불로 가열한다. 그래야 고구마 순 속까지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잘 밴다. 물론 들깨 넣지 않고 그냥 기름에 깨끗하게 볶아도 괜찮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말린 고구마 순은 결혼 후에야 맛을 보게 되었다. 울산 출신이신 시어머니가 해주신 것을 먹어본 것이다. 여름에 말려놓은 고구마 순은 꼭 고사리처럼 고동색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냄비에 물을 많이 붓고 푹푹 삶는다. 정말 오래 삶지 않으면 질겨서 먹을 수가 없다. 삶는 동안에는 고구마 순의 들척지근한 냄새가 푹푹 풍긴다. 먹을 만큼 물렀으면 건져 기름에 볶는데, 역시 간은 조선 간장으로 하고 가끔 뚜껑을 덮어 간이 배도록 해야 한다. 내 입맛에는 고사리나 고비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그래도 값이 훨씬 싸고 고구마 순의 감칠맛이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소나 먹는 것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고구마 순 볶음은 여름 밥상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만큼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독특한 씹는 맛이 일품이다. 몇 년 후에 엄마는 고구마 순을 다듬어 마치 열무김치 하듯 김치를 담가 먹는 데에 이르렀는데, 새콤하게 익으면 상큼하게 맛이 있었다. 가지 나물 등과 뒤섞어 고추장 넣고 밥을 비벼먹으면 열무김치 비빔밥보다도 맛있었다.

물론 고구마 순 볶음과 김치는 할머니도 잘 드셨다. 개성 사람의 실사구시 태도는 불필요한 관념에 매이지 않는 것이니, 맛있는 것은 빨리 인정하신 듯하다. 할머니는 구십까지 장수하셨는데, 이렇게 값싼 식재료를 골라 맛있게 반찬을 만드는 전북 출신 며느리 덕분임은 인정 안 하실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피란살이 할 때에 아랫녘 경상도 사람들이 하도 야속하게 굴어서 나중에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 올라오면 물 한 잔도 안 주겠다고 하셨던 할머니는 금쪽같은 손녀딸 둘을 경상도 출신 남자들에게 시집을 보내셨으니 참 세상사는 아이러니하다. ymlee0216@hanmail.net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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