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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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30면

5급 공무원을 채용할 때 정원의 50%를 외부 전문가로 뽑겠다던 행정고시 개편안이 물거품이 됐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혜 채용 파문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행정안전부는 유 전 장관 딸의 특채 파문이 일자 지난주 당정회의를 열어 이를 없던 일로 해버렸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없어질 것”이라거나 “부모의 벼슬에 근거해서 자녀가 벼슬자리에 오르는 고려시대 음서제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반발 여론이 일자 제대로 논의도 못 해보고 백지화라는 결정을 내려버렸다.

이정민 칼럼

정부가 고시 개편안을 내놓은 건 한 달쯤 전이다. 당시 행안부는 2015년까지 기존처럼 행정고시를 통해 정원의 50%를 뽑고 나머지 50%는 해당 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나 유경험자 등 전문가로 충당한다는 계획이었다. 행시 개편안에 대한 논의는 사실 이전 정부 때부터 제기돼 왔던 문제다. 공직사회가 고시 출신자들이 힘을 쓰는 기득권 세력화하면서 나타나는 ‘고시 귀족’들의 폐단이 점차 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고시제의 부작용은 우선 개방화·다양화·전문화라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고시족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학 시절엔 고시 준비를 위해 아예 정규 수업은 중단하다시피 하거나 몇 년간 고시촌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한다. 젊음의 한때를 희생한 보상은 어마어마하다. 일단 고시에 합격하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은 평생이라고 할 만큼 보장된다. 공무원으로서 신분이 보장되는 데다 외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라이벌 회사나 외국의 기업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열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문화가 만들어진다. 순혈주의와 엘리트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밖으론 닫혀 있고 제 식구끼리만 서로 감싸주는 배타적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일부 직급에 한해 부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개방형 직위제도의 경우 시행 10년이 됐지만 고시 출신들의 텃새와 견제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끼리끼리 문화’는 심할 경우 이번 유 전 장관 딸 특채 경우처럼 도덕적 불감증에까지 이른다.

고시제도를 수술해야 하는 이유는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국제 정세와 경쟁 구도 속에서 경쟁하지 않는 구조와 닫힌 조직은 버텨내기 어렵다.

특채 제도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5급 공채의 경우 나이를 20, 30대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입증하기 힘들다. 이렇게 되면 학연·지연이나 연줄, 부모와 친지의 영향력 같은 이른바 ‘빽’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음서제도가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도 꼼꼼히 따지고 보면 특채제도 자체가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공직사회의 순혈 구조와 폐쇄 문화에 뿌리가 있다. 고시 출신의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풍토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다루는 집권당의 자세는 너무나 가볍다. 한나라당은 음서제도의 부활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릎을 꿇었다.

행시 개편안을 백지화했다. 당정회의라는 데서 백기 투항의 결론을 내기까지 얼마나 심도 있는 논의가 오갔는지도 알 수 없다. 또 백지화로 인해 공무원들은 기존 질서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는데도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젊은 층 사이의 여론 악화, 특권층=부자정당이란 반발 여론이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잔뜩 겁먹은 모습만 보인다.

한나라당이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건 이번만이 아니다. 쇠고기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미디어법 개정에 반대하는 야당과 좌파 언론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도 한나라당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4대 강 사업이나 천안함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70%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를 믿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집권당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집권당이 정부의 논리를 무조건 뒷받침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의혹이 있다면 앞장서 규명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반대여론을 설득하는 헌신과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그게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당의 자세다. 깨지고 상처 날 게 두려워 뒤꽁무니만 빼고 있는 집권당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끼는 건 기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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