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나를 위해 쓰는 재능, 하루만 기부하자는 겁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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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08면

지난 4일 정재승(38·사진)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의 트위터(@jsjeong3)에 글이 올라왔다.

‘과학자의 강연 기부’ 앞장 선 KAIST 정재승 교수

‘어린 시절 우주와 자연, 생명의 경이로움을 체험한 청소년은 자연을 탐구하는 삶을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구 20만 명 이하의 작은 도시나 읍·면에선 과학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인구 20만 명 이하 작은 도시 시립도서관에서 과학자·공학자들의 청소년을 위한 강연시리즈를 하려 합니다. 강연기부에 관심 있는 과학기술 연구원·대학원생·교수, 행사 유치에 관심 있는 시립도서관, 후원기업 등 연락주세요.’

강의하고 싶다는 멘션이 수백 건 쏟아졌고 1만4000명이 넘는 정 교수의 팔로어들은 리 트윗으로 글을 퍼날랐다. 순식간에 타임라인이 강연 기부 릴레이로 채워졌다. 여기서 정 교수의 ‘과학자의 작은 도시 강연 기부’가 시작됐다. 과학자들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없는 지방의 청소년들을 위해 자발적인 강연 기부를 이끌어내는 프로젝트다.

트위터에 글이 오른 지 일주일 만인 11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열린 첫 준비 모임에서 정 교수를 만났다. 과학 재능이 없지만 행사 진행을 돕고 싶다며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홍보는 어떻게 할 건지, 행사 진행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2시간에 이르는 토론이 정 교수의 사회로 이뤄졌다.

정 교수는 중학교 2학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들었던 문화인류학 강의 얘기를 먼저 꺼냈다.

“중학생이 문화인류학을 접할 기회가 없잖아요. 교수님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에서 어떤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는지 강의하시는데 충격적이었어요. 문화인류학자들이 조사하고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중2 학생에겐 충격이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지도 그때 생각하게 됐고요.”

활발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는 과학자 정재승의 밑거름이 된 ‘인생의 강연’인 셈이다. 하지만 모두가 정 교수 같은 건 아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기회를 잡긴 더 어려워진다.

“지인들과 1년에 몇 차례씩 소도시 도서관을 찾아 강연을 했어요. 시 외곽의 읍·면·리에서 한 시간 넘게 버스 타고 온 학생들이 태어나서 과학자를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더라고요. 전국의 도서관에서 요청이 쇄도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자발적으로, 돈 들이지 않고 하는 방법을 생각하다 글을 올렸죠.”

“10명, 많으면 30명 정도 답할 줄 알고 강의료·교통비를 사비로 충당하려고 했다”는데 뜻밖에 반응이 뜨거웠다. 트윗을 올리고 몇 시간 만에 대학원생·의사·과학 교사 등 300명이 강의하고 싶다고 답을 보냈다.

강연은 10월 30일 오후 2~5시 전국의 시립도서관에서 동시에 열린다. 3~4명을 한 조로 묶어 30분 정도 강연하게 할 계획이다. 정 교수는 “지원자 중 80여 명이 강연에 나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약 서른 곳의 도서관에서 강연이 열리는 셈이다. 중학생 정도의 눈높이에 맞춰 슬라이드 등 시각 자료를 이용해 효과를 높일 생각이다.

“과학자들끼리 얘기를 해 보면 다들 과학의 경이로움에 대한 체험을 갖고 있어요. 그걸 잊을 수 없어서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거죠. 그런 체험 없이 직업으로서 과학자가 되면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탐구하는 삶이 의미 있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정 교수는 이 행사를 연례화할 생각이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을 ‘재능 기부의 날’ 정도로 정하는 거죠. 1년에 364일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청구해서 돈을 버는 거고, 단 하루만은 그 재능을 기부하자는 의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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