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한 '3대 세습'의 징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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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까지만 해도 김정일의 후계자에 관한 문제는 언론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학계에서 북한 신년 공동 사설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김정일의 부인인 고영희가 사망한 게 알려지면서 북한의 후계 문제는 갑자기 언론과 북한 전문가들의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1월 27일 북한 중앙방송의 정론 '선군의 길'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다시 한번 후계 문제가 관심을 끌고 있다. 한쪽에서는 이 정론이 '3대 세습'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중앙방송의 특성상 원문에 접근이 어려운 일반 시민들은 어느 입장이 맞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김정일도 '계속혁명의 사상'

문제의 중앙방송 정론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김일성이 각기 '나라의 본분' '조국 광복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과업을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한다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성취해야 한다고 한 말을 지적했다. 그리고 김정일이 "어버이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이 땅에 기어이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일떠세우고 인민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소개했다. 정론은 이어서 "원대한 뜻을 피력하는 시대는 달랐다. 그러나 위대한 문제는 하나같이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안은 것으로 뜨거웠다. 그것이 내가 다 못 가면 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가려는 계속혁명의 사상이었다"고 지적했다.

정론이 '3대 세습'을 시사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측은 이 부분이 김일성의 뜻을 이은 김정일의 유훈 통치를 언급했을 뿐 "내가 가다 못 가면 대를 이어서라도"와 같이 세습을 시사할 만한 직접적인 발언은 일절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정론에 의하면 김정일이 그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정론은 김형직과 김일성, 김정일이 동일한 '계속혁명의 사상'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입장이 김형직, 김일성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김일성이 한 말을 무시하고 김정일의 발언만 문제 삼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북한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조국 광복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과업을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한다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이 과업을 수행하고야 말 것"이라고 한 김일성의 1943년 발언을 보도했다. 이 발언을 다르게 표현하면 김일성이 못 이룬 과업을 김정일이 하고, 김정일이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면 김정철(또는 김정운) 대에 이르러서 계속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발언에 이미 '3대 세습'이 시사돼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겠다고 한 김정일이 후계 문제에서 김일성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건 분명 무리가 있다.

*** 후계자 지명작업 체계적 진행

물론 문헌자료만으로 '3대 세습'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북한에서 2002년 8월께부터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를 국모(國母)로 내세우는 개인숭배(김정철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음)가 군대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진행된 점, 김정철이 당을 장악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는 장성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2004년 3월 직무정지당한 점, 그리고 혁명 1세대의 전면 퇴진과 사회 전 부문에서의 급격한 세대 교체 등 후계자 지명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은밀하게, 그러나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징후는 많다. 3대 세습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3대 세습'을 위한 움직임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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