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공과 사는 여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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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강원도 속초 설악고 야구장에서 열린 ‘2010 KBO배 전국 여자 야구대회’ 플라워스-나인빅스전.

경기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수다전(戰)이 먼저 불을 뿜었다. “오늘 확 눌러버려.” “빨리 끝내고 샤워하러 가자.” 양쪽 더그아웃에서 터져나오는 고함에 학교 창문이 떨릴 지경이었다. “기 싸움이죠. 사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안 써요.” 나인빅스 최수정 감독이 말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알까기 전쟁’이다. 빠르게 굴러가는 땅볼은 글러브 밖으로 빠져나가기 일쑤다. 상대방 벤치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프로 선수들도 알까잖아요.”

한데 타격폼이나 방망이질 하나만은 저마다 메이저리그급이다. 나인빅스 홍은정은 타석에 들어서자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왼발을 살짝 뒤로 뺀다. 누구 하나 폼은 흠잡을 데 없다. 방망이도 매섭다. 매경기 삼진이 2~3개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엎치락뒤치락하던 경기는 결국 플라워스의 15-13 승리. 팀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승을 거둔 플라워스 감독과 선수들은 한데 어울려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억울하게 패했다고 생각한 나인빅스 김미희는 “어떻게 그것이 스트라이크냐”며 심판에게 항의했다.

‘그녀들만의 리그’엔 이렇게 수다도 있고, 진지한 승부욕도 있다. 공과 사랑에 빠진 여자들. 축구·야구·럭비 등 남성 스포츠에 뛰어든 여자들은 ‘마약같다’고 표현한다. 그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대기업 직원, 은행원, 카레이서 출신, KAIST 우주공학 박사과정생…. 미혼도 있고 주부도 있다. 대전의 동호인 야구 클럽 ‘대덕 보라미’ 팀의 박은옥씨는 두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기장에 왔다.

축구·야구·럭비에 도전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국내 첫 여자야구 동호회 ‘비밀리에’ 동호인들은 주말이면 모여 훈련과 경기를 한다.

야구에서 금녀의 벽에 무너진 것은 7년째. 2004년 1월 덕수상고(현 덕수고) 출신 국내 첫 야구선수였던 안향미씨가 동호인 모임인 ‘비밀리에’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축구는 벌써 20년이 넘었다. 여성 동호인 클럽만 전국에 129개(국민생활체육 전국축구연합회 등록), 소속 선수만 3236명에 이른다. 등록되지 않은 동호인들을 합하면 5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공놀이’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속초=이석희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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