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삶의 미련을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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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7보 (78~94)]
黑 . 이세돌 9단 白.구리 7단

80으로 살았다. 백A가 항시 선수라서 흑B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구리(古力)7단은 거지가 된 사람처럼 춥고 쓸쓸하다. 목숨은 살려냈지만 수레는 텅 비어 있다. 대신 뒤를 쫓던 흑은 81을 선수하며 빙그레 웃고 있다.

흑이 좌변의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을 쳐들어가 몇집을 깨뜨리고 후수를 잡은 것은 지금 국면에선 치명적인 실패였다. 욕망이 지나쳐 이세돌9단의 가벼운 변신을 간파하지 못했다.

자책하는 구리의 눈앞에 날카로운 단검 하나(83)가 날아들고 있다. 끔찍한 수다. 이세돌9단은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백의 뿌리를 뽑으려 한다.

가장 무난한 응수는 '참고도' 백1이다. 그러나 흑은 2, 4로 넘어가며 콧노래를 부를 것이다. 실속을 다 내주고 공중에 붕 뜬 백은 C의 단점을 지키기에 급급해진다. 이래서는 우변 흑진은 고스란히 집으로 굳어질 것이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배하는 길이다.

구리가 피를 토하듯 84로 저돌해 왔다. 몸을 날려 벽에 헤딩하는 듯한 이 수는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사람처럼 장렬한 분위기를 토해낸다. 그 속에 한 가닥 노림이 있다. 난전이 벌어지면 하변에서 길게 뻗어나온 흑 대마에 일격을 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 희망이다.

이세돌9단이 95,97로 물러서고 있다. 싸움꾼은 싸움꾼을 알아본다. 이세돌은 상대의 용기와 투혼을 인정하고 영리하게 예봉을 피하고 있다. 83의 한 수는 속절없이 잡혔지만 대신 두꺼워진 등판을 배경으로 우상 일대가 흑집으로 변하고 있어 승세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본다.구리는 긴 한숨을 토하며 92, 94로 흑의 안방으로 달려들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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