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2호 02면

얼마나 걱정이 많으십니까.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는 건 아닌지요. 신한은행이 모기업인 신한금융지주의 신상훈 사장을 검찰에 고소한 것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화가 많이 났을 겁니다. 신 사장이 특정 기업에 거액을 대출해 주도록 압력을 넣었다면 말입니다. 라 회장께서 대출 압력과 인사 청탁을 근절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왔던 터라 더욱 그럴 것입니다. 서슬 퍼렇던 5공 시절에도 권부의 온갖 압력을 막아냈고, 후견인이나 다름없었던 경제부총리의 청탁마저 뿌리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배신감도 클 겁니다. 그만큼 키워준 은공을 몰라주는 신 사장이 야속할 겁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을 것입니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신 사장을 고소했는데, 세상은 그렇게 봐주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라 회장의 노욕(老慾)으로 인한 내분이나 권력투쟁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세상이 믿어주지 않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영욱의 경제세상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여부야 곧 드러날 겁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될 테니까요. 하지만 사실 여부가 불명확한데도 왜 시중에선 처음부터 권력투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요. 최근 몇 달 새 라 회장과 신 사장의 관계에 크게 금 간 때문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이번 사태가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평생 아꼈던 후배이자 그룹의 2인자를 검찰에 고소할 때는 철저한 내부 조사와 충분한 소명 기회를 주는 게 정상입니다. 평직원에게 경징계를 내릴 때도 그래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절차가 일절 생략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전격적인 해임 통보를 받았을 때 왜 분노를 터뜨렸는지 알고 있는지요. 훗날 그가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사무실의 사환이나 청소부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해고되진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전에 그 어떤 진상조사나 소명 절차도 없었고, 라디오 뉴스로 해임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부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사안을 이렇게 떠들썩하고, 무리하게 추진했으니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말단 직원의 말에도 늘 귀 기울이던 라 회장의 평소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더욱 이해되지 않는 건 이번 일로 과거 30년간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라 회장께선 한국 금융의 최고 스타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조그만 은행을,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은행으로 키워낸 주인공입니다. 국내 은행 중에는 ‘금융의 삼성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들 합니다. 1991년 신한은행장이 된 이후 장장 20년 동안 최고경영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신한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회장이 불 속으로 뛰어들라면 뛰어들 준비가 돼 있다’던 직원들은 ‘콩가루 집안이 됐다’며 자조하고 있습니다. 고객 마인드에 투철한 믿음직한 은행이라는 이미지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회장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번 사태의 파장이 어떨지 말입니다. 그러니 이상하다는 얘기입니다. 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을 이렇게 무너뜨릴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숨길 건 숨기라는 어느 현자의 권고가 통하지 않는 지금, 별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해임 절차만이라도 연기하십시오. 검찰 발표가 난 후에 하는 게 순리입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 회장께서도 거취 문제를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국 금융의 전설’이란 명성이 남아 있는 지금이 거취 판단의 적기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버티면 살아남겠지’라는 미련이나 ‘내가 그만두면 관치(官治)가 시작되겠지’라는 우려는 버리십시오. 내분을 일으켰던 KB의 두 최고경영자가 모두 물러난 전례도 참고 하십시요. 타의에 의해 물러나기 전에 스스로 그만두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은행 걱정도 이제 떨쳐야 합니다. 미래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넉넉한 고독과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은 어떨까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