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우리 이름으로는 안 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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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의 비판적 지성을 대변하는 놈 촘스키 MIT 교수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일성을 발했다. '우리 이름으로는 안 돼'라는 제목의 이 성명서는 4000만달러를 들인 초호화판 취임식의 본질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어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촘스키도 미국이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국가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목표를 거스르는 어떤 국가와 집단도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것은 그 자체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불법과 고문, 대규모 인권 침해, 과학과 이성의 종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게 촘스키를 위시해 이 성명서에 서명한 9000명에 달하는 반(反)부시 인사들의 주장이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강한 어조에 눌려 가슴 답답해 하던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백악관에 포진한 네오콘의 세계 패권 전략에 일종의 '폭력의 혐의'가 느껴져도 '더 사악한 폭력'을 응징하겠다는 데에 항변할 국가가 어디 쉽겠는가 말이다. 부시 정권의 네오콘들은 샤린스키의 '민주주의론'을 금과옥조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혹시 전 세계를 향해 포고한 '자유의 성전'이 몇몇 폭정 국가에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인류사회의 미래의 대안들까지를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 기획일지 모른다고 '마을광장에 나가 소리치면' 너그럽게 봐줄 것인지. 취임사의 논조로 미루어 외교 무대에서 그런 항변을 한 국가엔 반드시 손을 볼 것 같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미국을 새로운 공격과 위협에서 보호하겠다'는 안보전략이 공세적으로 바뀌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어떤 이들은 어리석게도 미국의 단호함을 시험하려다 이를 실제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어리석은 '폭정의 전초기지' 국가들은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가 어떻게 쑥대밭이 되었는지를 고화질 화면으로 선명하게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라크는 조용한 안식일을 '불의 날'로 만들어버린 지구상의 악의 무리들을 '쓸어버리는' 성전의 맛뵈기일 뿐인가? 하기야 미국이 다음 상대로 이란을 지목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필자는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된 국가들이 온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시 1기의 안보전략에 영향을 미쳤던 로버트 카플란의 주장처럼 타타르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종갈등, 자원전쟁, 빈곤, 경계분쟁, 초국적 기업의 난투가 세계질서의 위협요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이 원인 제공자 중 하나였음을 성찰하지 않은 채, 문제지역의 상처받은 국가들을 대신해서 평화수호자로 나서는 논리는 몰역사적이다. 가용한 해결방식을 불문에 부치고 미국이 이렇듯 단호한 패권국가로 나서게 된 까닭은 9.11 테러 때문임은 주지하는 바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안보정책으로 급선회하자마자 세계의 지역분쟁과 테러는 곧 '미국의 문제'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미국의 자유는 다른 나라에서의 자유의 성공에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의 평화는 전 세계적인 자유의 확대에 달려 있다"는 취임사가 그것을 확증한다. 그래서 17분간의 짧은 연설에서 자유(freedom)라는 말을 34번, 폭정(tyranny)을 여섯번 언급했을 것이지만, 무력으로라도 자유를 이식해야 하는 패권정치의 딜레마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우리를 더 절박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이 강요하는 관계맺기의 방식이다. 세계의 자유가 곧 미국의 자유임을 천명하는 순간 모든 나라들은 반테러동맹에 가담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방주의적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국제협력 쪽으로 조금 돌아섰다는 시각도 있지만, 적어도 취임사에 나타난 강압적 논조로 미루어 서방의 다른 국가들에도 선택지는 현저하게 좁아진 듯이 보인다. 그런 만큼 핵문제로 연명하는 북한을 바로 곁에 두고 있는 한국으로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됐다.

'자유의 성전'에서 북한은 언제든지 공격대상으로 지목될 수 있고, 북한이 유화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 한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우리 이름으로는 안 돼'라고 외칠 수 있는 것도 미국민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런 성명서에서 약간이나마 위안을 얻는 한국민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용미(用美)나 승미(乘美)가 지혜로운 답임을 모르는 바 아니거늘,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화살로 침몰시킨 조선의 무지(無知)가 까닭 없이 부러울 때도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