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큰 결단 땐 현충원 찾듯 김정일 부자도 성지 순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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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동북 3성 방문이 결국 후계 체제 구축을 위한 포석 쪽으로 굳어지고 있다. 중국 지도부와의 현안 논의보다는 셋째 아들 김정은의 후계 지위를 다지려는 ‘부자(父子) 동반여행’의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들이다. 물론 평양을 찾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까지 제쳐두고 방중한 이유를 후계 문제만으로 국한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서 평양 권력 내부에 중국과 협의해야 할 모종의 돌발 상황이 생겼을 가능성에도 전문가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부 당국자들은 김정은의 동행에 무게를 두면서 김정일 방중을 후계 문제와 연관시키는 분위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27일 “북한에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권력 승계 문제 아니겠냐”고 말했다. 또 “우리도 큰 결단을 할 때는 국립현충원이나 아산 현충사를 찾지 않느냐”며 “그런 차원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 이런 언급은 26일 방중한 김정일의 움직임과 관련한 우리 정부의 판단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방문지로 일제 강점기 시절 김일성이 다녔던 지린(吉林)시 위원(毓文)중학교를 정한 것은 북한 정권이 내세워온 이른바 ‘항일 빨치산’ 정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란 얘기다. 항일은 북한 정권 정통성의 뿌리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도 “북한 국내용인 것 같다”고 말했다. 주민들에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의 필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란 것이다.

다만 정부는 이번 방중이 김정은을 중국 지도부에 소개하려는 데 초점을 맞춘 건 아니라고 본다. 이조원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스스로를 ‘주체의 나라’라고 주장해온 북한이 후계 내정자를 중국으로 데려가 고위층에게 소개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일의 건강 문제도 후계 구도 안정화를 서두르게 하는 요인으로 보인다.

전용열차 편으로 중국 방문길에 나선 김정일의 건강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26일 밤 호텔 투숙 이후 김정일의 추가적인 일정이 있었는지를 묻자 “아픈 사람이 어딜 가겠나. (숙소에서) 쉬어야지”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무리수를 두며 방중에 나선 것은 다음 달 상순으로 잡힌 노동당 대표자회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44년 만에 열릴 회의는 김정은에게 주요 직책을 부여하고, 노동당 권력구조 개편과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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