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구보타, 오와비, 소녀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한국전쟁 직후인 53년 10월 15일. 한·일 3차 회담의 재산청구권 위원회 자리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이 나왔다. “일본 측도 한국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 산을 푸르게 만들었고, 철도를 건설했고, 수전(水田)을 늘리는 등 많은 은혜를 한국인에게 줬다.” 이에 한국 측 홍진기 대표가 맞섰다. “한국인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구보타는 멈추지 않았다.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 혹은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해졌을 것이다.” 이 망언으로 한국과 일본은 4년간 협상이 단절됐다. 구보타는 끝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2. 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만나 ‘신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내놓았다. 공동선언문은 한글과 일본어 두 언어로 작성됐다. 오부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선언문에 담았다. 그런데 실무 논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어 선언문의 ‘오와비(お詫び)’를 한글로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 측은 ‘사죄’로 못 박았다. 대뜸 일 외무성 관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과’ 정도로 해야지, 너무 센 표현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이를 눈치 챈 한국 실무진들이 즉각 일한사전을 회의장에서 들이댔다. 사전에는 ‘오와비=사과, 사죄’로 돼 있었다. ‘증거’를 들이대자 일 외무성 관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사죄’를 받아들였다.

2010년 8월. 내일(29일)은 한·일 강제병합 칙령이 공포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구보타 망언에 가슴 멍들고 ‘오와비’ 시비로 눈에 핏줄 세우던 시대는 이제 갔다. 병합조약에 피눈물 흘리던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 가수를 신처럼 떠받드는 시대가 됐다. 사흘 전 한국 걸그룹 ‘소녀시대’의 도쿄 공연에 모인 2만여 명의 일본 젊은이를 지켜보곤 솔직히 가슴이 뭉클했다. 근 100년 전 우리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목메어 외쳤지만, 세월이 지나 이제는 일본의 청소년들이 일본 땅에서 “소녀시대 만세”를 한국어로 목메어 외치고 있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닌가. 어디 이뿐이랴. 삼성전자다 김연아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이제 동경의 대상이다. 한국 기업인의 지혜를 얻고자 일본의 관료와 정치인들이 줄을 선다. 격세지감이다.

구보타에서 오와비를 거쳐 소녀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 모두 땀 흘려 치열하게 뛰어 온 결실이 아니겠는가. 이제 과거사를 둘러싼 응어리도 병합 100년을 계기로 툭툭 털고 가자. 미진함이야 왜 없겠는가. 하지만 더 이상 일본을 상대로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한국에 위협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럴 힘도 없다. 반대로 어깨동무로 감싸줄 힘이 이제 우리에겐 있지 않은가.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