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기러기 아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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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아는 기러기 아빠가 한 명 있다. 늘 웃으며 “애들 교육을 위해 이런 고생쯤이야” 하던 그를 모임에서 만났다. 방학이면 캐나다에서 귀국하던 아이들이 여름 캠프를 간다고 못 온단다. 소주를 몇 잔 들이켜더니, 방학이면 보게 될 줄 알고 참아왔는데 “외로워 죽겠다”면서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와 엄마도 외롭기는 매한가지. 이번 미국 방문에서 10년 이상을 떨어져 지낸 기러기 가족을 만났다. 처음에는 미치도록 외롭고 남편이 그리워 달을 보며 울었지만 이제는 한가로운 지금 생활이 훨씬 더 좋단다. 방학마다 가는 고국 방문이 오히려 더 부담이 된다면서 아이들 대학 입학 후에 영구 귀국한다는 애초의 계획도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단다. 가족과 상봉할 날만을 고대하며 열심히 돈 벌어 바친 기러기 아빠들. 잃어버린 지난날의 보상은 누가? 잘못된 교육정책이 만들어낸 기러기들이니 나라에서 보상해 주려나?

처음엔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그곳 학교 시스템에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외국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정착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에 치를 떨며 떨어져 살던 부부들도 해를 거듭할수록 차차 그 외로움에 익숙해질 것이고. 설령 성공을 해서 부부의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한들 그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서로의 빈 공간이 어디 쉽게 채워지기야 하겠는가.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더 반갑고’라는 말도 하더라. 참 뼈 있는 말이다.

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절. 집집마다 남편들이 중동으로 건너가 일을 하며 돈을 송금하던 그 시절에도 문제는 많았다. 하지만 계약이 끝나 귀국하면 곧 정상 가정으로 복구가 되는 ‘중동 별거’와 기약할 수 없는 ‘기러기 별거’는 많이 다르다.

인간이란, 알을 낳자마자 자식에게 내 몸을 먹이로 내어주며 생을 마감하는 가시고기도 아니고 태평양 연어도 아니다. ‘더 좋은 교육’을 위해 희생을 한다지만 진정 ‘더 좋은 교육’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글로벌 시대인 요즘. 굳이 사는 장소를 따질 필요가 뭐 있느냐고들 한다. 하지만 고사리 같던 손이 곰취만큼 커가는 내 딸 손을 수시로 주물러도 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하는 것을, 어찌 영상통화와 견주겠는가.

9월이면 새 학기에 맞춰서 길 떠나는 새내기 기러기들. 그들을 보는 내 맘이 이리도 시린 이유는 뭘까. 평생 뿌리 못 내리고 떠도는 삶의 첫출발임을 알기에 그런가 보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