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지켜본 '아버지의 노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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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사건, 우리 국민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이제 다 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초기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앞 터널에서 비무장 양민 수백명이 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숨진 사건이다. 1999년 AP통신 보도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그 후 몇 개월간의 조사 끝에 2001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유감표명과 추모비 건립, 유족의 후손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약속이 나왔던 현대사의 멍울이다.

그러나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 대변인인 정구도씨는 이 책을 통해 노근리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을 '총성없는 전쟁'이라 규정하며 "이는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이라고 증언한다. 그는 경영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다. 공기업과 TV방송국의 간부도 지냈다. 외견상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는 그가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에 10년 넘게 매달린 것은 부친 정은용씨의 영향이다.

노근리사건의 생존자 중 한 명인 정씨의 부친은 이미 1960년 미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었다. 40여년에 걸친 투쟁의 시작이었다. 법적 투쟁이 벽에 부닥친 부친은 "내가 아니면 노근리사건이 역사에 묻힐 것 같아" 소설로라도 알리려 집필을 시작했고 아들 정씨는 1991년 원고정리를 도우며, 진상 규명의 사명감을 갖게 됐다.

이 책은 1994년 노근리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다리미디어) 출간 이후 대책위 구성에서 미국 정부가 약속한 추모사업이 지지부진한 현재까지 노근리 진상규명 노력을 담았다. 이 과정에서 국제법 전문가가 다 된 저자는 대체적으로 차분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상당수 대목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기록 은폐에 급급한 펜타곤의 자세, '사과'대신 '유감'으로 때우려는 미 정부의 태도 등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합동조사에서 미국 측에 휘둘리는 우리 국방부나 "미군 지휘관들의 사살명령 증거를 확보하기는 불가능하며 노근리사건은 우발적 사건이다"고 미국 입장을 대변한 어느 주미 한국대사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가치있는 이런 다큐멘터리를 담은 책의 디자인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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