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매니어 신원용씨]"내 세탁소엔 옷보다 오디오가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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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대구 약령시 골목엔 한약방 만큼 유명한 세탁소가 있다. 중구 수동 종로컴퓨터 클리닝. 주변 사람들은 이곳을 '세탁물보다 오디오가 많은 세탁소'라 부른다.

세탁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생활에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준다. 이 세탁소 주인 신원용(55)씨는 오디오 매니어다. 30년 전부터 오디오를 수집하며 맑고 부드러운 소리(음악)를 찾고 있다.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름 냄새가 코 끝을 확 스쳐간다. 수증기를 칙칙 내뿜는 다리미를 놀려대는 그의 뒤로 커다란 오디오가 턱 버티고 있다. 먼지가 앉고 상표도 보이지 않지만 우렁차게 나오는 소리는 맑고 부드럽다. 1943년 제작된 독일의 '텔레푼켄'으로 그가 애지중지하는 오디오 중 하나다.

세탁소 안은 오디오와 관련 부속품으로 가득하다. 걸려 있는 옷더미를 밀치면 나타나는 벽장과 방 두개에서도 오디오가 고개를 내민다.

한 40년 됐다는 미국산 제니스와 독일의 그룬디히,20∼30년 된 테악(TEAC) 녹음기 등이다. 진공관식 또는 트랜지스터식이다.

"30여년간 하나 둘씩 모으다 보니 1t트럭으로 두대분은 족히 될 만큼 많이 모았습니다."

고향 밀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오디오 전문점에서 잠시 일한 것을 계기로 그는 오디오에 관심을 가졌다.

"노래방에서 가수 흉내 낼 정도는 된다"고 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하는 그의 호기심이 평생 취미로 발전한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오디오를 뜯고 고친다. 그는 일본에서 세탁 기술을 익혀 가게를 낸 고모부의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워 20년 전부터 세탁일을 하면서 오디오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서울 세운상가·부산 국제시장·대구 교동시장을 돌며 중고 오디오를 사들였다. 마음에 드는 오디오 기기·부품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못해 고장난 오디오나 중고품을 샀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기술자에게 맡겨 고친 뒤 소리를 들어봤다. 그래도 시원찮으면 떨림장치인 혼(horn)을 스스로 만들어 갖다 붙였다. 혼 속에 나무막대를 끼워보는 등의 실험을 수없이 했다. 스피커 등 기기를 조합해 좋은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제 그는 종이·플라스틱·알루미늄 등으로 된 떨림장치보다 놋쇠로 된 혼을 붙이면 더 좋은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요즘 아들(26)이 찾아주는 인터넷 자료를 빼놓지 않고 읽는다. 오디오에 관심있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문하기도 한다. 옆에서 재봉틀질을 하는 그의 아내(51)는 종종 "일은 않고 또 무슨 짓이냐"며 언성을 높이곤 했다. 덕분에 그는 가수의 공연현장에서와 같은 노래 소리를 연출할 수 있게 됐다. 좋아하는 팝송·클래식이 하나 둘 늘면서 음악에 일가견을 갖게 된 것이다. 최신식 디지털 오디오는 장인이 만든 진공관·트랜지스터 식보다 맑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점도 알게 됐다.

그는 손때가 묻은 오디오를 통해 FM라디오·LP판·CD를 들으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줄곧 서서 일하는 그에게 오디오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그가 오디오를 틀면 이웃 사람들이나 손님들은 "내가 어릴 때 듣던 전축 같다"거나 "음악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독지가는 클래식 해설집과 LP판 60개를 기증했다. 고향인 밀양에 사둔 4백여평의 땅에 오디오 전시관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좋은 소리는 머리를 맑게 한다"는 그는 오늘도 음악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대구=황선윤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suyo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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