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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7>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42.발굴현장도 수색하던 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갑작스러운 한파는 인수봉에서 암벽 등반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냈지만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발굴 대원들에게도 값진 교훈을 남겼다. 악조건 속에 최선을 다해 발굴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추위 때문에 땅이 얼지 않았다면 유물과 집터의 기둥자리를 영영 찾지 못하고 반쪽 발굴로 끝났을 것이다. 마지막 바닥 토층(土層)까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이후부터 어떤 발굴이든 마무리 토층조사를 철저히 했다.

1971년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은 75년 4차 발굴까지 계속됐다. 나는 71년 1차 조사에만 참가했다. 이건무(李健茂) 당시 국립박물관 조사원(현 학예연구실장)은 4차 발굴에 참여했다. 당시의 경험을 이실장은 한참 뒤 박물관 신문에 기고했는데 지금 읽어보면 암울했던 70년대 중반의 시대상이 느껴진다.

'…4차 발굴 당시의 시국은 3선 개헌 후였던 관계로 꽤나 어지러웠다. 소위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수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여파가 한적한 발굴현장에까지 미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대학교 3년 후배였던 유영표씨는 서울문리대 잡지 『형성』의 주간을 맡았던 학생운동의 거물로서 당시에 수배 중이었다. 유씨의 매형은 당시 중앙박물관의 관리과에서 계장으로 근무하던 최은경씨였고 또 발굴단원이었던 한영희씨는 유씨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같은 학과 동기동창이었다. 따라서 경찰에서는 매형과 친구인 한씨가 짜고 유씨를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발굴현장을 수색한 것이다. 형사들은 먼저 발굴단 숙소를 조사한 뒤 현장에 와서 한씨에게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발굴단에서는 유씨와 연락이 전혀 없었고 발굴중임을 들어 거부했으나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게 되어 결국 한씨의 경찰서행을 막지 못했다. 별일이 없었기 때문에 한씨는 그 이튿날 다시 발굴현장에 나오게 되었으나 그 뒤에도 형사들은 박물관에 자주 찾아오곤 했다.…'

험악했던 70년대 사회분위기가 생생하다. 한영희(韓永熙)씨가 75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고 처음 참가한 발굴 현장이 암사동 선사유적이었다.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을 통해 한씨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의 선두주자가 됐다. 한씨는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99년에 불귀의 객이 됐다. 잠시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편 당시 수배 대상자였던 유영표(柳英彪)씨는 그후 매일경제신문 기자로 근무하다 지금은 매일 바이어스 가이드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네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암사동 선사시대 움집터에서 모두 26동의 집터를 확인했다. 조사지역 일대에 선사시대 집단 마을터가 있었음을 광복 후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최초로 밝히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는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해 79년 7월 일대 79,812㎡, 약 2만5천여평을 사적 267호로 지정해 보호해 오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선사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재발굴 조사했다. 조사 후 9동의 움집터의 움집 바닥과 벽면을 화학약품을 이용해 단단하게 경화(硬化)처리, 직접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했다. 야외 움집도 복원해 명실공히 선사공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지난 99년에는 다시 유물전시관을 추가 건립해 선사인들의 생활상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고 2000년부터 해마다 신석기시대를 주제로 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강동구(구청장 김충환)는 암사동 유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사적 지정 범위를 확대한 데 이어 남북한 신석기 문화 국제학술대회를 공동개최하기 위해 김구청장이 지난 봄에 직접 평양 강동군을 방문하기도 했다. 자치단체의 이런 노력이 하나하나 쌓이면 암사동 선사유적 공원은 세계적인 명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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