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검표' 차분하게 처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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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선 후유증이 미묘하게 번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컴퓨터로 이뤄진 개표에 '오류와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수(手)작업에 의한 재검표를 요구했다. 이를 위한 법적 절차인 투표함 증거보전과 당선무효 소송을 냈다. 괴담 수준으로 인터넷에 급속히 퍼졌던 전자개표 시스템 조작설이 법정에 공식 등장하게 된 것이다.

패배 직후부터 한나라당의 한쪽은 정보기관 개입설, 컴퓨터 집계 프로그램 조작의혹, 해킹설로 휩싸였고, 일부 지지자들의 재검표 요구로 선대위 해단식이 취소되는 소동이 있었다. 한나라당의 소송은 당내 기류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후보 지지표로 분류된 1백장 묶음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표 12장이 발견된 작동오류 사례도 그런 결정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담도 만만치 않다. 재검표 요구가 李후보의 정계은퇴 선언이 낳은 '아름다운 퇴장'이란 평판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깨끗한 패배 승복에 상처를 낼 수 있고, 노무현 시대의 개막에 찬물을 끼얹으려 한다는 냉소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문제 제기의 추가 과정은 더욱 신중하고 차분해야 한다. 盧당선자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정치적 공세가 아니다'는 접근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 의혹을 푸는 게 盧당선자의 업무수행에 도움을 준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재검표 요구가 지지자들의 낙담과 분노를 쏟아내는 배출구로 활용돼선 안된다. 선거 패배에 대한 지도부 문책론에 쏠린 관심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 위한 방편이어선 안될 것이다. 1987년 대선 때 DJ진영은 패배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컴퓨터 조작설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중앙선관위는 반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표에서 집계까지 컴퓨터에 의존하는 시스템에 유권자는 익숙하지 않다. 육안 확인 등 3중 안전장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관위도 컴퓨터 개표의 정착을 위한 진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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