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물흐르듯 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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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대선 승리 후 첫 기자회견에서 확고한 개혁 입장을 표명했다. 개혁이 '급진적 방식이 아닌 안정감 있는 추진'임을 분명히 했다."개혁이라는 것은 어느 한 시기에 계단 올라가듯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라는 말에서 그의 개혁 원칙이 잘 드러난다. 盧당선자는 자신에 대한 '급진·불안정'이미지를 깊이 인식한 듯 주요 국내외 현안에 대한 답변 때마다 '전문가·책임자들과의 협의를 통한 철저한 준비'의지도 곁들였다.

우리가 '새로운 정치' '평화·번영의 한반도 시대'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 운영'등 국정 운영의 기본 못지 않게 '안정 속 개혁' 천명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 국민이 김대중 정부의 연이은 일방적 개혁 슬로건에 피로감을 느껴온 탓이다. '개혁 독재'는 개혁 피로 현상을 몰고 온다는 지난 정권의 개혁을 반면교사로 삼아 盧당선자는 '물 흐르는 듯한 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본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기존 정책 기조의 유지를 확실히 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한·미·일 간의 긴밀한 공조 협력을 거듭 역설한 것도 자신에게 쏠리는 불안한 시선을 불식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는 "'여중생 사건'으로 국민 감정이 크게 표출된 것 외에는 한·미 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요구는 없었다"고 했다. 한·미 간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는 불변이라는 얘기다.

盧당선자는 정치 개혁에 깊은 관심을 피력하면서도 무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여소야대 정국 타개를 위한 인위적 정계 개편과 관련해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알아서 해야 하며…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두가 협력할 것"이란 언급은 매우 시사적이다. 정계 개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의 유보 조항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분배·복지를 강조해온 자신에 대한 경제계의 불안감을 씻으려는 배려도 세심했다. 盧당선자는 재벌 개혁과 관련한 자신의 본뜻이 왜곡 전달됐다면서 "대기업의 왕성한 경제활동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만 불합리한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경제 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에 경제에 부담이 안 가도록 고쳐 나가겠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경직을 지적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민대책'질의·답변 과정은 '조심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盧당선자는 전문팀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요지로 말을 맺었다가 회견 말미에 보완할 만큼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또 "집값과 물가는 반드시 잡겠다"면서도 "경제 활력을 추구하되"라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盧당선자의 절제된 개혁론은 그의 국정 운영 스타일과 방향에 의구심을 갖던 국내외 많은 인사에게 일단 안도감을 주고 있다. 이제 국가 경영의 책임자로 자리한 盧당선자가 선거를 통해 반영된 민심을 개혁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수용하면서 물 흐르듯 조용히 추진하느냐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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