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으로 불우이웃 돕는다 얼굴 없는 이색 선행 '훈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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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봉실(27ㆍ여)씨는 지난해 5월 한 종신보험에 가입했다. 근데 그 보험이 참 희한하다. 정씨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보험이 아니다.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보험이다. 정씨 사망 후 지급되는 보험금이 전액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내가 아니라 순전히 남을 위해 매월 보험료를 내는 것이다.

정씨는 매달 3만원씩 보험료를 꼬박꼬박 낸다. 앞으로 20년간 그러할 것이다. 정씨는 피보험자를 한 자선단체로 지정해뒀다. 정씨가 사망하면 보험회사는 2천만 원 정도를 그 자선단체에 지급하게 된다. 정씨가 보험 만기 전에 사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보험가입 종용을 받고 망설였다. '살면서 매월 3만원씩을 기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그러나 자신의 사망 후 기부가 삶을 정리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보험 만기 전에 사망하더라도 거액을 기부할 수 있어 이를 선택했다.

비록 큰 재산은 없지만 사망 후 나보다 못사는 사람을 위해 큰 돈을 기부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요즘 왠지 마음이 뿌듯하다.

이런 종신보험을 개발해 운용하고 있는 회사는 ING생명보험이다. ING는 지난해 4월부터 '사랑의 보험금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험을 판매했다.

보험금은 한국이웃사랑회와 UNICEF가 받을 수 있게 했다. 물론 가입자가 다른 자선단체를 수혜자로 지정할 수도 있게 했다. 이 운동은 조용히 진행됐다. 떠들썩하게 내세우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지난 11월말 현재 7백69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사망 후 자선단체에 기부하게 될 돈은 모두 1백53억원이나 된다.

이들은 대부분 20~40대다. 30대 회사원이 가장 많다. 대부분 매월 1만~5만원씩을 보험료로 낸다.

성탄과 연말을 앞둔 요즘. 세상은 시끌벅적하다. 자녀ㆍ연인ㆍ부모를 위해 선물을 사랴. 거래처에 돌릴 선물을 마련하랴. 그러나 이는 모두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으레 때가 되니 하는 연중행사다.

종신보험을 통한 기부행위가 필부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런 세모에 찾아든 훈훈한 얘깃거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큰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샐러리맨들이다. 매스컴에 종종 보도되는 수십·수백 억 원을 학교나 자선단체에 쾌척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ING생명 노구미 차장은 "가입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 보험 가입 사실이 밝혀지기를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 나의 삶도 다할 것이다. 그 전에 남을 위해 뭔가 하고 간다고 생각하니 이제 언제나 마음이 가볍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40대 가입자의 말이다.

이 운동은 이 회사 재정 컨설턴트 최세연씨가 제안했다.

그는 "보험금 기부운동은 선진국에는 활성화돼 있다. 우리나라는 자선단체들이 국가 지원, 후원회원들의 기부금, 재산가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으나 보험을 이용하면 누구에게도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이웃돕기 기부금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ING는 지난달 18일 이들 가입자를 위한 사은행사를 했다. 유명 재즈 가수 '로라 피지 체인지 콘서트'로 초대해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02-3703-9545.

조용현 jowas@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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