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노무현시대]"그냥 참 좋습니다 … 국민에 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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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일 오후 10시22분.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축하하는 지지자들의 물결을 헤집고 10여m 앞의 건물 2층 기자실까지 걸어오는 데 10분이 걸렸다.

당원들과 노사모 회원들이 뿌리는 노란 풍선과 색종이가 盧당선자의 머리를 뒤덮었다.

기자들과 만난 盧당선자는 국민·당원들을 향해 "정말 감사합니다"란 말을 다섯번이나 했다.

그러면서 盧당선자는 "저와 맞서 열심히 노력하시고 애석하게 패배한 우리 이회창(李會昌)후보님께 노고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말했다.

또 "열심히 선전해주신 권영길(權永吉)후보님, 선전하신 데 축하드리고 계속 발전하시길 바랍니다"고 했다.

그리곤 4층 상황실로 올라가 2백여명의 당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盧당선자는 "순탄하게 해오지 못하고 우여곡절이 많아서, 많은 분들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 많았다"며 사과부터 했다. 盧당선자는 "모두 제 탓이거니 생각한다"며 "항상 미안하다. 옛일로 생각하고 새롭게 한번 해보자"고 당부했다.

당직자들의 연호와 박수가 상황실을 울렸다.

盧당선자는 "과거 초능력을 가진 유리겔라라는 사람이 마음을 모으면 통일도 이룰 것이라고 했는데 마음을 모아 단일화 경쟁에 이기고 선거에 이겼다"며 "이제 대통령이니만큼 더 무겁게 한발 한발 가겠다"고 다짐했다.

盧당선자는 "후보단일화의 결단을 내렸을 때 제가 안되면 하는 걱정보다, 제가 후보가 되지 않았을 때 민주당의 역사와 전통,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며 선거 기간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盧당선자는 "하여튼 그냥 참 좋습니다"라고 기분을 압축했다.

이날 盧당선자의 얼굴은 수척했다. 그러나 오전의 그늘 대신 상기된 홍조로 덮였고, 목소리는 감격에 벅차 가늘게 떨렸다.

이날 새벽부터 盧당선자는 올 한해동안의 모든 고생을 한꺼번에 몰아서 되풀이 겪었다.

그는 선거운동 마감시간 1시간 전에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대표의 '기습적인' 공조 파기 선언을 접한 뒤 鄭대표의 자택으로 부랴부랴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당사로 발길을 돌려 측근들과 밤샘회의를 했다.

회의 후 盧당선자는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이때가 새벽 5시30분.

"솔직히 鄭대표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盧당선자는 토로했다. 단일화로 쌓아올린 지지가 신기루가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북 발언은 이틀 이상 해 온 것으로 그간 전혀 문제 제기가 없었고, 정동영(鄭東泳)·추미애(秋美愛)의원에 대한 말은 격려와 덕담 차원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盧당선자의 표정은 오후 6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내내 어두웠다.

그는 당초 일정을 잡아놓았던 고향(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선영 참배 계획도 취소했다가 오후에야 정대철 위원장 등의 설득으로 부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투표가 진행되던 중 김해공항에서 盧당선자는 "특별한 자산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니 장벽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거듭 토로했다.

그러나 끝내 승리한 盧당선자는 당원들에게 "저도 잘하고 우리 민주당도 잘해서 5년 뒤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만납시다"라고 말한 뒤 1백여m 근처에 있는 우당(友黨)을 향해 출발했다.

정몽준 대표의 통합21이 아니라 김원웅(金元雄)의원·유시민(柳時敏)대표 등이 주도하는 개혁적 국민정당이었다. 향후 盧당선자의 강력한 개혁노선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강민석·서승욱 기자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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