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따뜻하게]구두 닦아 세상 '광'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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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의 손에선 항상 발 냄새가 난다. 비누로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쿠린내가 풍긴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마디에 배어 있는 이 냄새는 맡으면 맡을수록 구수해진다.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36세의 노총각 이민수(李敏洙)씨. 그는 기계공학 학사 출신의 구두 미화원이다. '물광'(구두를 물 묻은 천으로 계속 문질러 윤을 내는 것)의 귀재다. 그의 손길을 받으면 빗물 먹은 구두도 기어이 빛을 뿜고야 만다.

그의 진짜 직업은 구두 미화원이 아니다. 철도청 용산차량사무소 차량관리3팀에서 기차 바퀴와 제동·완충 장치 등을 정비하는 기술자다. 李씨는 식사·휴식시간 짬짬이 구두를 닦아 부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공무원의 영리업무 및 겸직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제64조를 어겼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구두를 닦아 버는 돈(월 35만원)이 고스란히 불우 청소년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일에 李씨가 처음 손을 댄 것은 10년 전. 1993년 초 서울산업대를 졸업하고 공채로 철도청에 입사한 그는 작업을 나간 선배들의 구두를 한두번 닦아보았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구두 닦는 게 제 특기거든요. 86년부터 서울 서대문 인근 부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는데 민간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보초를 서다 보니 군화를 닦는 데 온 정성을 쏟았죠. 제대할 때가 되니까 물광 솜씨가 손에 붙었습니다. 이런 재주를 썩이는 걸 아쉬워하다가 실력 발휘를 해본 거죠. "

한데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 일었다. 그의 물광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동료들로부터 "돈을 줄테니 지속적으로 닦아달라"는 부탁이 이어진 것이다.

"그 돈을 제가 쓰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의미있는 일에 쓰고 싶었죠. "

첫달 수입을 정신지체아 보호소를 후원하던 동료에게 건넨 것으로 그의 선행은 시작됐다. 그에게 구두를 맡기는 동료는 35명으로 불었고 그만큼 수입도 많아졌다. 돈을 보내는 단체도 두곳으로 늘었다. 하지만 그의 휴식시간은 점점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쉴 시간이 별로 없죠. 근무 틈틈이 구두를 모두 닦아야 하니까, 밥을 20분 이상 먹으면 안됩니다. "

그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물광(켤레당 7분)만을 고집한다.

"'불광'(구두를 닦은 뒤 불에 달궈 빛을 내는 방식)을 내면 시간은 짧게 걸려도 구두 가죽이 나빠지고 빛의 은은함도 덜하거든요. "

그의 진지함은 동료들에게 연구 대상이다. 선임차량관리장인 최창준(崔敞準·40)씨는 "10년을 곁에서 지켜봤는데 세상에 저렇게 착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고 했다.

"다들 쉬는 시간에 혼자 구두더미에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 같으면 절대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같은 사무소 내 김영내(金英內·40)씨의 말이다.

막상 李씨는 동료들에게 감사할 뿐이란다.

"동료들이 제게 주는 월 1만원씩은 순전히 선·후배들이 가엾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희사하는 거예요. 제 일이 무슨 1만원 가치가 있겠어요. 제가 몸을 다쳐 몇달 못 닦았을 때도 여러 사람이 그냥 돈을 줬어요. 아이들에게 보내라고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땐 '10년 정도만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이젠 그만둘 수가 없어요. 아이와 동료들이 있는데 어떻게 중단하겠어요. "

저녁을 먹어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구두 냄새가 밴 손을 흔들며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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