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라크戰 도울 예멘 요구 수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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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 화물선 서산호 나포 사건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한차례 소동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북한이 12일 핵동결 해제를 전격 선언함으로써 미국은 서산호 나포 사건으로 전혀 뜻밖의 '초대형 한반도 위기 국면'을 자초한 꼴이 됐다. 시멘트 부대 속에 꼭꼭 숨겨둔 스커드 미사일을 15기나 찾아냈다며 기세를 올렸던 미국이 돌연 배를 풀어준 배경과 서산호 나포 사건의 매머드급 파장을 짚어 본다.

◇왜 잡았다가 풀어줬나=백악관과 미 정보기관의 안이한 상황 인식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물론이고 앞으로 있을 이라크전에서 미국이 절대적으로 협조를 구해야 할 예멘이 이토록 강하게 나올 걸로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은 당초 배를 억류해 이라크와의 관련 여부에 초점을 맞춰 전면 조사를 벌이고, 예멘 측에는 상황이 이러하니 미사일 인수를 포기해 달라고 요청하면 받아줄 것으로 판단했는데 이것이 완전한 오산이었다"고 보도했다.

예멘의 알리 압둘라 대통령을 설득하려다 오히려 강력히 항의만 받은 딕 체니 부통령은 "어차피 풀어줄 것이면 바로 풀어주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백악관의 한 관계자는 "부시 대통령은 '매우 매우' 불쾌하게 풀어주는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주권국가이자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를 돕고 있는 예멘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은 무엇을 얻고 잃었나=부시 행정부의 상황 판단 능력에 대한 비판이 당장 제기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 안보팀의 내부적 모순과 혼돈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줬다"(로버트 아인혼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제대로 조사도 않고 돌려보냄으로써 북한의 잠재적 위험성만 키웠다"(에드워드 마키 하원 비확산문제 특별위원장)는 비난이 일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크게 손해본 것도 없다는 평가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TV로 생중계되듯이 북한의 미사일 수출현장을 정확히 잡아내 전세계에 알린 데다, 그동안 핵·생화학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제의 필요성이 저평가됐던 미사일 거래 문제도 이제는 같은 차원에서 취급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거래 규제를 위한 다자간 협상이 힘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순순히 배를 풀어준 데 대해 사실상 북한에 '면죄부'를 내줌으로써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공인한 꼴이 됐다는 지적도 있지만 앞으로는 어떤 나라도 미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쉽사리 북한 미사일 수입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반도 최악의 위기 국면=중국을 방문 중인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11일 "북한은 과거부터 대표적인 미사일 확산국가였고, 그래서 언젠가 이런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충분히 예견했다"면서 "기존의 대북 정책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파장을 축소했다. 하지만 북한이 바로 다음날 제네바 기본합의 파기와 핵동결 해제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냄으로써 미국의 '부주의'가 결국 한반도 상황을 최악의 국면으로 악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joon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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