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美시위와 對美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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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장면1=1980년 5월 25일 오후 광주시 전남도청 앞. 시민 궐기대회가 열리는 동안 미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한다. 시내 곳곳엔 광주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미 항공모함이 부산에 정박해 있다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장면2=85년 5월 23일 낮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미 문화원. 서울시내 5개대 학생 73명이 기습적으로 미 문화원을 점거해 미국에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 인정과 공개사과를 요구한다.

#장면3=2002년 12월 7일 밤 서울 광화문. 학생과 네티즌, 일반시민 등 1만7천여명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미군 무한궤도차량에 의해 숨진 여중생을 추모하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의 개정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

위의 세 장면은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시대별로 잘 보여준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을 '수호천사'로 생각했다. 6·25전쟁 때 군대를 보내 나라를 지켜줬듯이 어려움에 처하면 우리를 도와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다 8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부터 일부 대학생 등 사이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국이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한국군 병력의 이동을 승인한 만큼 마땅히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소수였고, 사법처리의 대상이었다.

신효순·심미선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요즘의 촛불집회는 어떤가. '주한 미군 철수' 등과 같은 극단적인 반미(反美) 구호는 나오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느 대선 후보는 연설을 하려다가 참석자들이 "정치인은 빠져라"고 외치는 바람에 물러섰다고 한다.

사고 차량 운전병 등에 대한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집회와 행사가 꼬리를 물고 있다.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된 촛불집회엔 연예인들까지 가세하는 등 참가자들이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고, 문인·교수·변호사 등도 SOFA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촛불집회가 왜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피어보지도 못한 채 쓰러진 두 생명을 향한 안타까움과 추모의 표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의 발로이자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따라서 반미(反美)시위라기보다는 미국을 향한 '대미(對美)시위'로 보는 게 옳다.

대미시위가 반미시위가 되지 않도록 한국과 미국 정부가 함께 발벗고 나서야 한다. 특히 미국 정부의 성의와 노력이 절실한 때다. 아무리 법체계가 다르다고 해도 운전병 등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진 데 대해 한국인들은 자존심이 상해 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조기 신문에는 최근 지휘관에게 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한 미군 병사의 기고문이 실렸다. 그는 "2박3일간 5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 데다 넓은 우회도로 대신 좁은 지방도로를 이용했다"면서 "사고 당일 아침 지휘관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했으나 묵살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미군측이 지휘관을 기소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번 사건이 한·미관계의 새 지평을 여는 촛불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두 나라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집회 참가자들도 절대 폭력을 사용해선 안된다. 정치적 목적이 개입돼선 더더욱 안될 일이다.

sh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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