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5) 민심을 얻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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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결같이 “공비(共匪)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믿기지 않았다. 빨치산이 잔혹 행위를 하더라도 마을을 송두리째 불에 태우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미 불에 탄 집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비통함을 참지 못해 울부짖는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마을의 촌로(村老)들은 우리가 다가가면 뭔가 숨기는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부대원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감출 수 없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진 직후인 7월 국군 헌병에 잡힌 북한군 병사의 모습이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숨어 있는 적,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국군의 작전이 전쟁 도중에벌어지면서 민간인의 피해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의 자료를 모은 『한국전쟁·Ⅱ』(눈빛·박도 엮음)에 실린 사진이다.

나는 마을 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촌로들은 처음에는 말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집요하게 매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며 계속 묻자 노인들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국군이 우리 마을을 통비(通匪) 부락이라고 한 뒤 불을 질렀다”고 대답했다. 통비라고 하는 것은 빨치산과 내통을 했다는 뜻이다. 부락민을 빨치산과 같은 사람들로 보고 국군이 불을 질렀다는 얘기였다. 대답을 하는 촌로들의 표정이 싸늘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깊은 불신의 골을 느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눈빛에는 불신과 절망만이 가득했다.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焦土化) 작전이었다. 적과 아군을 제대로 식별할 여유가 없을 때 빠른 진압을 위해 국군이 간혹 펼치곤 했던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빨치산과 관련이 없는 양민(良民)에게는 한순간에 가옥과 전 재산을 잃는 절망적인 일이기도 했다.

당시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양민의 피해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진압군은 인내(忍耐)를 발휘해야 한다. 섣불리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양민의 피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우선 마을 노인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리고 “피해를 복구하도록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겠다”고 한 뒤 광주로 돌아왔다. 나는 즉시 부대에 남아 있던 경비를 모두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3000만환이 있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다시 이남규 전남도지사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흔쾌히 나섰다. 다음 날 나는 이 지사와 함께 한천 마을을 찾았다. 촌로와 주민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는 땅에 엎드렸다. “모두 사단장인 저의 책임이니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나는 “곧 겨울이 닥쳐오는데 주민 여러분이 길바닥에서 떨지 않도록 군과 도에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여기 부족하지만 3000만환과 구호물자를 가져왔습니다. 한 집에 10만환씩 나눠 쓰시고, 도지사께서도 마을 재건을 위해 적극 돕기로 하셨으니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그때야 마을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근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등 월동 준비에 나섰다. 병력을 동원했고, 전남도청도 적극 마을 재건에 나섰다. 불에 탄 마을은 곧 정상적인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덧 5사단은 그들의 마음을 얻어 가고 있었다.

사건 경위를 알아보니 마을에 불을 지른 사람은 한천 마을 출신의 5사단 장교였다. 육사 3기 출신인 그는 ‘머슴의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수모를 당했다고 했다. 그런 원한에 젖어 그는 자신이 컸던 마을을 ‘통비 부락’으로 지목해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당장 그를 처벌하고 싶었지만 더 급했던 것은 민심을 되돌리는 일이었다.

다행이었다. 마을 재건작업이 차츰 끝을 맺어 갈 무렵에는 주민들이 부대로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군인들이 직접 나서 집을 다시 지어 주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보상금까지 제대로 지급하자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그들은 손에 곶감을 들고 부대 문을 들어서 나를 찾았다. “마을을 다시 일으켜 줘 고맙다”며 그들은 곶감 등을 내게 건네고 사라졌다.

나는 한천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사단 참모들과 연대장 등 지휘관들에게 주지시켰다. 대민(對民) 업무를 수행할 때의 원칙도 강조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나는 민심을 얻어야만 산속에 숨어 들어간 빨치산을 제대로 토벌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이는 내가 51년 가을에 다시 지리산의 빨치산에 맞서 싸워 이기도록 한 밑거름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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