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없는 미인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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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합동토론은 딱딱하고 규정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정답 맞히기 대회'처럼 진행됐다. 모두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준비된 답변은 공허했다. 후보들은 스스로의 장점보다는 약점을 감추는 데 급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인대회였지만, 미인은 없었다.

각 후보의 이미지를 종합 정리하면 노무현 후보는 자기방어에 피곤했기에 청문회 스타의 명철함이 부각되지 못했다. 이전의 개별 토론에서 나타난 '서민의 형님'과 같은 이미지보다는 마치 김대중 정권의 죄를 뒤집어쓴 여당 후보의 이미지만이 부각됐다. 이에 비해 이회창 후보는 노련한 정치가이면서 야당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권영길 후보는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 훈수를 두는 옆집 아저씨의 푼수기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각 후보의 이미지와 화법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대쪽 이미지'가 가진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사랑하는' '존경하는'등의 말로 부드럽고 감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자신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존경하고''사랑하는'용어가 실제 李후보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열심히 얘기하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이 생각났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李후보의 답변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듯이 유창하고 깔끔했다.'만악(萬惡)의 근본은 DJ의 실정(失政)에 있으며, 노무현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논리는 청문회 스타인 盧후보의 이미지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李후보의 화법에서 성공한 것은 김대중 정권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본인의 이미지가 현 정부의 실정과 그렇게 차별화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미지 변화에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야당의 외로운 투사'이미지는 李후보와는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았다.

합동토론에서 가장 강점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됐던 노무현 후보는 자신의 이미지가 혼란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盧후보가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에게 무리없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결과다. 마치 자연미의 미인이 진하게 화장을 해서 예쁘게 꾸며보려 한 부자연스러움이다.

특히 "저희 당이 그렇죠, 뭐"와 같은 표현은 "앞으로 잘 할게요"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기존의 정치 현실을 그냥 수용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번 토론에서 盧후보는 방어적이었으며, 李후보의 공격에 끌려다니는 듯한 이미지를 주었다. 그것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김대중 정권의 실정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잘 봐주세요'식의 태도를 보인 결과다. 원래 자신만이 가진 이미지가 무엇이며 이것을 TV토론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판단착오일 것이다.

권영길 후보는 노무현 후보보다 오히려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權후보의 화법은 정몽준 대표의 화법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문제의 핵심에 대한 답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피력하면서 결과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은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이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를 일시에 뚜렷이 부각하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부패원조당이고, 민주당은 부패 신장개업당"이라는 특이한 용어는 당분간 시중에 회자되면서 이미지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약력:서울대 심리학과·동대학원 졸업, 미 하버드대 심리학박사

토론 모니터링 및 분석토론 참여:장근영·김도환 박사, 김지연·허세진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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