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 잊은 UN장성 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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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비무장지대(DMZ)의 지뢰제거작업이 재개돼 동해선 임시도로 개통이 임박한 가운데 유엔사 제임스 솔리건 소장은 지난 28일 '운전자든 승객이든 유엔사의 승인 없이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기려 할 경우 남북교류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국내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머지않아 개통될 임시도로를 통해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뤄지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인상을 준 것이다. "남북한의 교류를 지지한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그 같은 입장 표명은 의례적인 것이고 속마음은 다르지 않으냐는 것이다. 남북한 교류협력의 확대는 대체로 대한민국 역대 정부가 중요한 정책목표로 삼아 왔고 국민적 합의도 어느 정도 이뤄져 있는 사안이다. 이 같은 중대 사안의 성사 여부를 유엔사의 소장이 "안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월권행위에 가깝다.

금강산 육로관광은 상당히 많은 수의 관광객과 관계자들이 정기적으로 MDL을 통과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들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등 과거 MDL 통과 때의 관례를 들어 통과자 명단을 우리 정부가 접수해 유엔사에 통보하면 자동 승인되는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솔리건 소장의 발언은 이같은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최근 지뢰제거의 검증절차를 둘러싸고 북한과 유엔사측이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북한이 어떻게든 정전협정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어, 유엔사측이 예민해진 것은 이해할 만하다.

정전협정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인 장치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수단인 교류협력의 확대는 정전협정의 목적에도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정부도 정전협정 체제를 손상하는 데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유엔사측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교류확대를 위해 불가피한 MDL 통과 문제가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협의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보였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kim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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