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대통령을 뽑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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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내가 『삼국지』를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동 문고판이 아니라 여러 권으로 나뉜 장편 소설이었는데, 소싯적 감명이 꽤나 컸던지 책 표지의 저자 이름까지 외어버렸다. 뒷날 누가 나관중 얘기를 꺼냈지만 나는 내가 본 대로 삼국지 저자는 서인국이라고 박박 우겼다. 나의 오해(?)는 이것만이 아니어서, 유비는'우리 편'이고 조조는 '나쁜 놈'으로 머리에 새겼다. 이렇게 '소년기 독서'를 끝낸 뒤, 대학 동아리 토론에서 다시 삼국지를 접하게 됐다. 당시 중공(中共)의 해석에 물든 탓인지, 유비는 황실의 종친이나 내세우는 '쪼다'이고 조조야말로 세상을 뒤집으려는 '반항아'로 비춰졌다. 이 '청년기 독서' 효과는 제법 오래가서 내 삼국지 이해의 잣대로 굳어졌다.

1천8백년 전의 봉건 윤리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 그대로 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치세의 도리로서 정치는 그제나 이제나 별반 다르지 않다. 피치자의 동의를 구하는 선거라는 절차가 있지만, 그것을 잘 쓴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유권자는 주인이면서도 왕조 시대의 습관대로 집권자의 선의와 능력에 기대는 것이다. 난세의 간웅 조조는 그 사례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모든 일에 앞장섰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 현대적 버전이 교육 대통령이고, 경제 대통령이고, 외교 대통령일 터다. 그러나 이런 '재능'은 대통령의 덕목에 앞서 오히려 결격 사유이기 쉽다.

우리는 교육 개혁을 단행한 대통령이 교육을 망치고, 경제 대통령을 자임했던 분이 경제의 기초를 망가뜨린 전례를 익히 알고 있다. 이 무렵 나는 삼국지 주연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좀 멍청하고 모자라는 듯한 유비를 다시 보려는 '장년기 독서'가 시작된 셈이다. 안목과 지략이 월등한 공명을 수하에 거느린 것은 뭐니뭐니 해도 유비의 인품이었다. 공명이 천하 삼분 대계를 논하도록 멍석을 깔아주고 바람을 막아준 유비의 도량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처지가 뒤바뀌어 공명이 유비를 부렸다면 그렇게 멋진 인화의 연출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요컨대 유비의 몫과 공명의 몫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들보다 4백년 앞서 유방과 한신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를 남겼지만 한신은 결국 유방의―여후(呂后)의―손에 죽고 만다. 그렇다. 대통령은 교육도 알고, 경제도 알고, 외교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이 그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각료의 몫이고 관리의 몫이다. 대통령은 그냥 대통령으로 족하다. 이 말을 나는 현재의 후보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여기는 유권자의 책임도 있다.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만능의 탤런트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음달 3일·10일·16일 텔레비전 중계로 대통령 후보들의 합동 토론이 예정돼 있다.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 조사의 가공할 위력은 노무현(盧武鉉)과 정몽준(鄭夢準)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실감했다. 이번에도 후보들의 진면목을 보이기 위해―껍데기를 벗기기(!) 위해―온갖 궁리를 모으겠지만, 나는 이 토론이 행여 '재치 문답'으로 빠지는 일이 없기 바란다. 후보들은 과감한 대답으로 한 표를 얻기보다 순간의 실수로 한 표를 잃는 사태를 더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토론은 전천후 모범 답변과 감점 피하기 응답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리고 퀴즈 문답으로 후보들을 괴롭히지 말자. 통계 숫자 하나를 잊었다고 대통령 직무 수행에 결정적 차질이 오지는 않는다. 사건 하나하나를 달달 외우는 것이 대통령 자질의 필수 요건도 아니다. 텔레비전 토론이 무슨 기억력 시합이나 순발력 테스트가 아니라면 정책의 문제점과 차별성은 충분히 가려내되, 나라와 사회를 책임질 후보들의 포부와 경륜을 가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의 약속을 얼마나 정직하게 행동으로 옮길지 따져보는 것은 시청자의 숙제다. 계속 패하는데도 백성이 유비를 따른 것은 바로 이 실천 의지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포퓰리즘이지만 그런 포퓰리즘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멀지 않은 나의'노년기 삼국지 독서'가 어떠할지―유비의 보수에 안주할지 조조의 개혁으로 다시 반전할지―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전에 한번쯤 말과 행동이 정직한 '그냥 대통령'을 뽑고 싶다. 이 숨가쁜 시기에 한가하게 삼국지 타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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