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조>매화, 그 얼을 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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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매화, 그 얼을 심다

정수자

◇시작노트

지난 봄 '매향리에 매화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따라 매향리를 다녀왔다. 매향리는 미군 사격장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의 갯마을인데, 계속되는 포격연습에 갯벌은 불임이 되어가고 있었다. 푸르던 두 섬도 하나는 완전히 뭉개졌고 하나는 반쯤 무너진 채,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사람만 아니라 흙이며 가축 등 마을 전체가 포소리에 흔들리며 얼마나 앓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모독을 겪는 땅이 매향리뿐 아니건만, 사격연습장이 건재하듯 여중생을 죽게 한 미군 역시 건재하는 구도가 쉬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매화나무를 심으며 많이 부끄러웠는데, 제발 나무들이 겨울을 잘 나서 봄에는 철조망 마다 꽃을 피우길 빌고 있다. 어서 사격장이 떠나고 매향리가 아름다운 매화향을 되찾았으면….

◇약력 ▶1957년 경기 용인생 ▶1984년 세종숭모제 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한국시조작품상, 수원문학상 수상 ▶시조집 『저물녘 길을 떠나다』

오늘 여기 천 그루의 어린 희망을 심네

포성 총성 진동하는 아직도 전쟁중인

매향리, 모독의 땅에 서늘한 얼을 심네

오십 년간 흔들리며 불임을 앓는 갯벌

몸 대주고 문드러진 포격용 귀섬 농섬

옛 푸름 길어 보다가 귀를 붉혀 섰다가

긴 치욕을 떨치듯 늦은 무릎 맞대노니

상한 흙의 가슴들 꼭꼭 여며 비노니

철조망 건듯 녹이며 피고 피라, 매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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