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文化대륙'을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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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 이제 전시가 열리겠구나." 지난 13일 중국 선양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던 유물 인수 대표단의 입에서 이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북쪽 관계자의 환대에서 이렇게 직감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한순간에 '고구려!'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지난 몇 개월의 마음 고생을 떨쳤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구려 유물전을 기획했던 몇몇 단체들이 결국 눈물을 삼키며 전시를 포기해야 했던 그 결정적 대목을 넘기고서야 대표단은 두 발을 뻗고 잠잘 수 있었다고 했다.

'고구려!'전은 산너머 산의 난관을 뚫고 남북 교류의 새 장을 열게 됐다. 가뜩이나 이번에 전시품을 선별하고 준비한 북쪽 관계자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터 아닌가. '안악 3호분' 등 5기의 고구려 벽화무덤을 복원한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평양 건축건재대학, 만수대 창작사 실무자들은 "제 자랑 같아 좀 뭣하지만 사실 이 작품들을 정작 남에 내려보내자니 너무 아깝다"고 함박웃음을 짓더라고 했다.

북측 관계자들은 또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남쪽 사람들에게 보이려 만든 걸 다시 가져가시렵니까"라는 대표단 질문에 "한 번 옮기려면 그리 힘이 드는 걸…좋은 임자가 나타나면 선물로 드려야죠"라고 화답해 벽화무덤 복원품은 남쪽에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서 다음 달 6일, 열흘 앞으로 다가선 이번 전시회(서울 삼성동 코엑스 특별전시장)를 기다리는 마음은 예와 같지 않다.

"지난 날의 우리 나라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대였다. 중세 초기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로서 동방에 떨친 정치적 위세에 있어서나 막강한 군사 경제적 위력에 있어서 당대로서는 높은 발전 수준을 이룩한 정치적 대국, 군사적 강국이었고 선진 문명국이었다."

2001년 북한 사회과학출판사가 펴낸 『고구려 고분연구』 머리말 중 일부다. 왜 우리가 다시 고구려를 들추는지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고구려는 남북이 함께 그리워하는 한민족의 원형이자 고향이다. 고구려에는 '휴전선'이 없다. 남과 북이 민족문화의 공통점으로 꼽는 모든 것이 고구려에 있다. 그 고구려 문물이 남북 최초로 교류하는 '특별기획전 고구려!'는 그 자체로 통일의 지렛대다.

고구려가 지닌 정조는 패배나 우울의 기색이 전혀 없는 웅건한 기상이다. 서울에 온 고구려 유물들을 본 학자들은 "그 형상 언어가 품은 표현력이 이미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고 놀라워했다. 지난 22일 공개된 '해뚫음무늬 금동장식'이나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은 섬세함과 웅장함이 잘 어우러져 이뤄낸 조화가 어느 쪽으로 한 치도 기울지 않았다. 한 뼘짜리 금제 장신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힘과 패기는 또한 미묘하면서도 예민한 정서로 감싸안아져, 밖으로 뻗어가고 안으로 웅숭깊은 겹의 미를 이룬다. 고구려가 양식적 완성도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 문화가 드러내는 이런 세계사적 보편성은 그동안 고구려를 주로 영토적 측면에서 바라본 일종의 국수주의적 시각을 바로잡아야 함을 보여준다. 선조들은 군사력이 아닌 성숙한 문화로 당시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것이다.

특히 고구려 무덤벽화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실물로 전해지는 그림 가운데서 가장 풍부한 양을 기록한 회화 유산이다. 이를 통해 역사 기록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각종 사회제도와 생활풍속, 당시 도달했던 과학기술과 종교 신앙적 측면까지 폭넓게 밝혀낼 수 있는 입체적인 종합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황수영 전 국립박물관 관장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고분벽화가 차지하는 위치를 현대의 매스컴에 비유해 이렇게 말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문자로 기록한 신문이라면, 고구려 벽화는 컬러 텔레비전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의 상당량이 외국 기자들이 피상적으로 쓴 외신을 인용보도한 것이라면, 고구려 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제작한 생생한 현장 화면뉴스다."

같은 시대의 중국에 벽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과 비교해보면, 고구려가 얼마나 우월한 문명을 창조했던 우수하고 안정된 집단이었는가를 되새길 수 있다.

복원된 벽화무덤 속에 들어가 1천5백년 시공을 뛰어넘는 타임 캡슐을 타고 고구려로 날아가면 거기 우리 남북이 함께 그리워하는 한민족의 시원이 나타난다. 고구려 벽화무덤은 그 자체로 '21세기의 디지털'이다. 이제 우리가 그 문을 함께 열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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