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스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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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우스 신전의 신탁(神託)으로 유명한 '도도나'는 그리스 북부 에피루스 지방에 위치해 있다. 에피루스는 비록 현재는 그리스의 한 지방에 속해 있지만 과거엔 독립된 왕국이었으며 많은 신화와 연관된 문화적 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그렇다고 에피루스가 신화 속에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전쟁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피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무장(武將)들, 예술인들과 연관을 맺고 있다.

에피루스에는 BC 2000년께부터 도리스(Doris)인들이 정착해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적이었으며 패기가 넘쳤다. 이들이 소아시아 서안에 기반한 이오니아의 여성적인 성격과 결합하면서 그리스 고전미술이 완성됐다.

오늘날 많은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이탈리아의 장인(匠人)브랜드 불가리(BVLGARI)도 이곳 에피루스와 연관이 깊다. 불가리의 창시자 소르티오 불가리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에피루스 출신의 그리스인인 것이다.

불가리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기묘하게 결합된 은세공품을 만들어 고대 그리스 고전미술을 완성한 에피루스의 명성을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에피루스가 세계사에 유명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피로스왕 때문이다.

그는 로마를 비롯해 카르타고 등 주변국과의 숱한 전투를 벌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한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를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로 빼앗아 온 것도 피로스였다. 카르타고는 피로스왕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로마와 세계사에 유명한 포에니 전쟁에 돌입해 결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왕 피로스의 이름이 들어간 단어, '피로스의 승리'는 전쟁의 승리자에게 바쳐지는 긍정적인 헌사가 아니라 '희생이 너무 커 승리의 의미가 퇴색한 전쟁'이라는 부정적인 경구로 쓰인다.

새로운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연속적인 작은 전쟁의 승리감에 도취돼 인심을 잃고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결국 큰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 지구상에는 당초 기대와 달리 평화가 아니라 냉전 때 못지않은 수많은 전투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류에게 새로운 평화와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계속해 진행되고 있는 이런 수많은 전투와 짧은 승리가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볼 때, 과연 인류에게 '피로스의 승리'가 아닌지 곰곰이 곱씹어 볼 때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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