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화장실에 들이댄 카메라 인생을 찍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화장실, 어디에요?'(감독 프루트 챈)를 보기에 앞서 일단 주의사항이 하나 있다.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톱스타 장혁과 조인성에 '홀릴' 이유가 없다. 물론 그들이 영화에 나오고, 비중도 적지 않지만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진 없다. 영화는 그 이상의 다른 것을 보여준다. 기승전결이 꽉 짜이고 모험과 액션이 가득하진 않지만 인생의 뒤안을 찬찬하게 응시하는 '눈'을 만날 수 있다. 뭔가 느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화라고 할까.

1970년대 서울의 산동네를 따뜻하게 그린 상반기 화제작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몸져 누운 아버지 대신 똥지게를 지고 산동네 화장실 청소를 다녔던 임창정의 자연스런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였다.

여기서 화장실은 단순히 물리적 욕구를 해소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서민의 경제·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사실 20여년 전만 해도 '용무'를 해결하려고 공중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화장실, 어디에요?'는 더러운 곳, 혐오스러운 장소로 치부되는 공중화장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 '쇼킹 아시아'류의 충격적 화면은 전혀 없다. 영화에선 참기 어려운 악취도, 보기 역겨운 오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삶의 여러 측면, 사회의 다양한 구석을 대변하는 등가물, 문화적 상징체로서의 화장실이 부각되는 것이다.

예컨대 베이징(北京)의 화장실에선 미혼모가 갓난아기를 버리고, 뉴욕의 화장실에선 총기 살인극이 일어난다. 부산의 한 횟집에 마련된 임시 화장실에선 뼈가 없는 신비의 해양 소녀가 출현한다. 남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쉬'를 하는 인도에선 길거리가 바로 화장실이다. 홍콩의 공중화장실에선 부랑자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목욕도 한다.

언뜻 이 영화는 화장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로 읽힌다. 기동성이 뛰어난 디지털 카메라로 낚아챈 부산·베이징·뉴욕·홍콩·인도 등의 풍경이 생생하다. 때론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도 준다.

하지만 영화의 요체는 삶에 대한 천착이다. 인생의 생로병사를 읽는 매개체로 화장실을 동원했다. 지역별로 등장하는 인물도 다르다. 화장실에서 버려져 할머니 손에서 자란 베이징 청년 동동(아베 츠요시), 횟집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고 있는 부산 청년 김선박(장혁)이 주인공이다.

영화는 이들을 '투 톱'으로 삼고, 그들의 여러 친구를 요령있게 엮어놓으며 한편의 로드 무비를 완성시킨다. 둘의 공통점은 주변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다. 동동의 할머니는 장암 선고를 받았고, 또 그의 친구 토니의 동생은 위암 말기다. 또 김선박의 단짝 친구인 조(조인성)는 유전성 불치병을 앓고 있고, 그가 우연히 만난 신비의 해양소녀(김양희)는 바다 오염으로 활력을 잃었다.

'화장실 어디에요?'의 등장 인물들은 각기 명약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동동은 부산을 거쳐 뉴욕으로, 토니는 무념의 나라 인도로, 조는 베이징으로 발길을 돌린다.

영화는 이들의 여정을 빠른 영상으로 겹쳐놓으며 탄생과 죽음, 질병과 치유, 우정과 사랑 등의 녹녹치 않은 주제를 인상파 그림 비슷한 분위기로 표현해낸다.

현실적 배경과 초현실적 상상이 중첩되는 화면도 독특하다. 재래식 변기에 앉아서 사과를 씹어 먹거나, 질병엔 처녀 오줌이 특효라고 말하거나, 마주 앉아 용변을 보며 인생을 얘기하는 등 유머스런 장면도 많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부담스러울 듯하다. 얘기가 듬성듬성 끊기고, 인물간의 연결도 매끈하지 못하다. 영상·구성 모두 창의적이나 분위기가 나른하고, 삶을 뚫어보려는 열정은 대단하나 이를 따라가기가 꽤나 버겁다.

'화장실, 어디에요?'는 한국에서 기획·제작하고 홍콩·일본 스태프를 기용한 한국영화다. 올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업스트림)에서 호평을 받았고, 토론토·함부르크·런던·부산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2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