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실명제의 역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9호 31면

얼마 전 잘 알고 지내는 어느 포털 업체에서 스마트폰 용도로 개발한 위치기반서비스(GPS 등의 위치 정보를 이용해 식당·명소 등을 추천하고 사진도 올리는 서비스)를 평가해 달라고 연락해 왔다. 앞으로 가장 중요한 스마트폰 서비스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승낙을 하고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실행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민등록번호부터 요구하고 아이디를 만들어야 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스마트폰에 그런 것을 일일이 넣을 시간도 없고 불편하기도 할뿐더러 여기저기서 정보 노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렇게 황당하게 서비스를 개발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이 서비스는 안 된다’고 말해 줬다.

그랬더니 해당 서비스를 개발한 담당 임원이 트위터를 통해 DM(남들은 보지 못하는 사적인 메시지)으로 애로사항을 토로한다. “인터넷 실명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합니다. 저희도 스마트폰 앱이나 소셜 웹 서비스를 이렇게 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현행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그의 답변을 보면서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인터넷 실명제가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새로운 서비스들의 발목을 잡는 엉뚱한 파급 효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절감하게 됐다.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 악성 댓글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07년 발효된 법(2006년 국회 통과)이다. 일방문자 10만 명을 넘는 인터넷 게시판(서비스)의 경우 주민등록번호 등을 이용해 본인 확인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입법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나 시행 내용 중에는 정보화 시대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미 일부 인터넷 매체는 일방문자 10만 명이 넘으면 댓글 달기를 금지하거나 소셜 댓글이라는 서비스를 활용해 모아보기 형태로 우회하는 편법을 구사한다. 구글의 유튜브라는 동영상 서비스는 한국을 주소로 하는 경우 아예 동영상 업로드와 댓글을 달지 못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래서 유튜브에 동영상을 업로드하려고 자신의 위치를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표기하고 계정을 유지하는 사용자들이 늘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는 글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익명성을 전제로 무책임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저질·음란·비방 글들이 검색과 재창작 등을 통해 인터넷에서 확대재생산 되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필요성을 가진 법이다. 그러나 최근 인기를 끄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웹 서비스들은 기본적으로 인터넷상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글·사진 등을 업로드하고 있다. 누가 정보의 원천이었는지 금방 추적할 수 있다.

그 덕에 자율적인 자정 작용이 강해지는 추세다. e-메일만 있으면 간단히 가입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사회적인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집단적인 관계 끊기를 통해 그 세계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일부 인터넷 게시판이 가졌던 부작용이 발생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국내 업체들은 시대에 뒤처진 인터넷 실명제의 함정에 빠져 사람을 중심으로 한 유용한 서비스와 인프라를 개발하고 제공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복잡한 가입 과정과 개인 프라이버시 유출을 우려한 사용자들이 서비스 자체에 등을 돌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 서비스 산업의 글로벌화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국내 개발 서비스들이 외국 서비스에 밀려 역차별되는 현실을 만들고 있음을 우리 정부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인터넷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다. 이런 커다란 변화에 맞춰 적절하게 법이 개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지훈 한양대 의대 졸업 뒤 미국 남가주대에서 의공학 박사 학위를 땄다. ‘하이컨셉&하이터치’ 블로그 운영자. 의학·사회과학·공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미래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