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존']아우슈비츠, 그 잿빛 절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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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는 햇빛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서 구더기란 유대인을 말한다.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6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그레이 존'은 홀로코스트(대학살)에 관한 영화다.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많은 유대인들이 고통받는다. 수용소에는 '존데르코만도'라는 특수한 팀이 있다. 팀에 속한 유대인들은 동료가 죽음을 당하면 시체 소각을 담당한다. 이들 팀원은 딱 넉달의 시간을 허락받는다. 넉달이 지난 뒤엔 다른 사람처럼 가스실로 보내진다.

탈출을 꿈꾸는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맞서 폭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레이 존'은 제한된 삶을 사는 이들이 현실에 저항하고 좌절을 겪고,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음을 기록하는 드라마다.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59년작 '안녕하세요'에서 재치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첫번째 컬러영화에서 모든 화면에 붉은 색을 등장시킨 것. '그레이 존'은 같은 견지에서 '회색의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죄수복과 수용소 건물, 시체를 태우는 연기, 그리고 거기서 남은 재, 모두 회색이다.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 없는 유대인들을 다룬 영화이니 어쩌면 당연한 설정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작은 빛줄기를 비춘다. 시체 소각을 담당한 이들은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을 발견한다. 가스실의 생지옥에서 죽지 않은 소녀를 찾아낸 것이다. 존데르코만도의 어른들은 "넌 살아남아야 해"라고 다짐하며 아이를 독일군의 손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쓴다.

그들에게 이 아이는 한때 스스로 따뜻한 '인간'이었음을 확인시켜준 존재다. '그레이 존'은 배우 출신의 팀 블레이크 넬슨이 각본과 연출을 겸했고, 하비 케이틀·스티브 부세미·미라 소비노 등이 우정출연했다. '그레이 존'의 사실적 힘은 영화가 실화이며 실존 인물들이 모델인데서 비롯된 에너지다. 원제 Grey Zone. 2001년작.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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