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 피해 떠나는 한국 기업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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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예상대로 일이 벌어지긴 벌어졌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후보가 전격 후보 단일화에 합의함에 따라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후보의 독주였던 한국 대통령선거는 또다시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정책도 지지기반도 완전히 다른 盧후보와 鄭후보가 이견을 어디까지 좁혀나갈 수 있을 것인가. 1988년도 현대중공업 사태 당시 1년차 국회의원이던 盧후보는 이 회사의 회장이던 鄭씨를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鄭씨 역시 "정서적으로는 이회창 후보 쪽에 가깝다"고 인정하고 있다.

철학도 이념도 다른 두 사람의 협상은 합의 이튿날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흔히 "대선은 재미있는 편이 낫다"고들 하지만 선거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국민의 관심이 적은 대통령선거도 처음이라는 게 한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다. 예전 같으면 술집에 모인 30∼40대 샐러리맨들의 화제는 단연 정치와 주식시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치는 구석으로 밀려나고 아파트(부동산)와 자녀교육(조기유학), 그리고 직장(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지)의 세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여론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저조해서일까. 대선 후보들 간 입싸움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鄭후보 형제가 분할상속한 현대그룹의 대북 비밀지원과 주가조작 의혹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전략은 어느 정도 鄭후보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벌써부터 재계에는 "어떻게든 선거에 관여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다. 그 결과가 재벌 총수들의 외유 러시다.

이건희(李健熙)삼성 회장은 지난 8일 일본을 방문, 경영계획과 인사구상에 들어갔다. 귀국은 내년 초라고 한다. 박용성(朴容晟)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엑스포 유치와 유도연맹·상공회의소 행사 등으로 연말까지 총 세차례에 걸친 장기 해외출장에 나선다. 鄭후보의 형 정몽구(鄭夢九) 현대자동차 회장 역시 지난달 22일 출국, 엑스포 유치를 겸해 그룹의 해외지사들을 시찰하고 연말에 귀국할 예정이다.

6개월 전 "차기 대통령은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인물이다. 정책면에서 후보들을 검증하고 지지를 표명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유력 재벌총수들도 일찌감치 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모두 대선과의 관계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나 도피성 출국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정보기술(IT)시대라고 하지만 '톱다운(하향식 경영의사 구조)'경영이 특기인 한국의 그룹 총수들이 이렇게까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어떻게 회사가 굴러갈까. 선거와 무관한 내용의 인터뷰를 신청해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무리"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하이닉스 반도체의 해법과 현대증권 매각 문제 등은 벌써부터 '차기 정권의 숙제'로 넘어간 것 같다.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A그룹과 B그룹은 도산한다""은행장 중에서는 X씨와 Z씨가 물러난다"는 식의 대선 후의 변화를 예측하는 소문들이 파다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특징은 싸운 뒤에도 돌아서면 곧 잊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선거전이 2강 체제로 접어들면 후보들 간의 상호 인신공격이 더욱 뜨거워질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박소영 기자 ol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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