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자(漢字)의 최고 특장은 적어도 3천년, 길게는 반만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실제로 사용돼온 생명력이다.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설형문자나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당연히 한자 문화권 지식인들은 수천년 전 고대인이 쓴 글을 그대로 읽어내고, 그 생각을 직접 느끼며, 다시 같은 글로 자신을 표현하며 문명의 켜를 넘나들어 왔다. 이 같은 '시·공간적 초월성'은 비(非)한자권, 특히 서양인들에겐 경이로움으로 비춰져왔다.

시·공간적으로 광대무변(廣大無邊·넓고 큼)한 한자문화 가운데서도 그 정수(精髓)는 한시(漢詩)다. 선인(先人)들이 갈고 다듬은 수천년의 지혜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펼쳐놓은 까닭이다. 한자가 지닌 뜻글자(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의 상징성에 그림글(상형문자·象形文字)로서의 함축적 추상미(美)까지 결합돼 일찍부터 동양 3국의 지식인들은 한시를 짓고, 쓰고, 또 걸어놓고 보기를 즐겼다.

그래서 선인들이 남긴 글월을 활용해 읊조림으로써 오늘의 자신을 대신 얘기하는 은유(隱喩)는 매우 오래된 교양 취미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주석이 지난 10월 미국 방문 당시 느닷없이 당(唐)나라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한시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로 만찬사를 대신한 것은 한자문화권 수장으로서의 자긍심이다. '일엽편주는 이미 첩첩산중을 지나고 있구나(扁舟已過萬重山)'는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비유다. 미국과의 양국관계가 어려움 속에서 순항하고 있음에 만족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11월이면 정권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넘기게 되는 시원섭섭한 마음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국인 특유의 호방함과 초연함을 효과적으로 과시한 장면이었다.

대검 중수부 2과장 김진태(金鎭太)검사가 최근 고문사건으로 구속된 후배 홍경령(洪暻嶺) 전 검사를 위로하는 한시 '슬픈 칼잡이 이야기(哀憐劍士說)'를 검찰통신망에 올려 화제다. '가을밤에 홀로 강월헌에 올라(秋夜獨上江月軒), 가슴 아프게 떠나간 칼잡이 한사람을 떠올린다(回憶恨去一劍士)'는 도입부는 글을 쓴 계기. 마지막 '칼청엔 안타까움과 근심만 가득하고(嘆聲憂慮滿劍廳), 초겨울 하늘엔 궂은 비만 내리오(寒天烟雨倍沈沈)'는 이번 사태를 보는 심경을 담고 있다. 착잡한 심경을 그윽하게 읊어낸 풍류가 이채롭다.

오병상 대중문화팀장

obsang@joongang. co. 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