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김우룡씨:오전은 의사로, 오후는 사진작가로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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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한때 택한 만족스럽지 못한 일에 끝까지 얽매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사지를 옭아매는 현실이 우리의 변신을 쉽게 허락하지 않지만 말이다.

김우룡(金佑龍·45)씨는 원래 의사다. 그렇다고 지금 의사란 직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서울 혜민병원 종합검진센터에서 오전부터 오후 1∼2시까지 근무한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그는 사진작가로 변신한다. 의사 가운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가 찾아낸 '또 다른 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 찍는 일은 물론 사진과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며 사진에만 몰입한다.

서울대 의대 75학번인 그는 1981년 경남도청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사진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병원선을 타고 남해안 일대 2백여곳의 섬을 돌아다니던 그에게 섬 사람들의 생활은 앵글에 담기 좋은 소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섬사람들을 찍는 일에 빠져들었다.

"사진의 사실성, 그 리얼리즘만이 부패한 시대의 소금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 사진의 매력에 정신없이 내 마음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은 사진을 좋아한다.

86년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할 때였다. 사진에 미친 그는 하얀 가운에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작은 카메라를 넣고 다녔다. 회진을 돌 때나 밥을 먹으러 갈 때는 물론 응급실에서조차 환자들에게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 치열한 표정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교수나 동료들이 곱게 보아줄 리 없었다. "네가 의사냐"는 교수의 꾸지람은 그래도 괜찮았다. "환자가 죽어가는데 한가하게 카메라나 들이대고 있어"라는 동료들의 질책은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카메라에 중독된 상태였다.

급기야 93년 말엔 울산에서 개업한 병원 문을 닫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인도행을 결심했다. 스스로 "무책임했다"고 말하는 그는 그때 의사의 꿈을 접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세차례 인도를 다녀왔고 이듬해 '인도인의 얼굴'이란 첫 사진전을 열었다. 그리고 2년 후엔 사진·산문집 『꿈꾸는 낙타』(행림출판)도 펴냈다. 이때 포기할 것 같았던 의사란 직업을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 생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게다가 사진으로만 생계를 잇는다면 사진이 싫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요."

이런 이야기를 할 무렵 그는 영국 작가 A J 크로닌 이야기를 꺼냈다. 크로닌은 의사였지만 작가가 되면서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한 사람이다. 크로닌은 말년에 쓴 책에 "푸슈킨·프로스트가 뭐냐, 도대체 문학이 뭐냐. 차라리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낫지"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때 金씨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크로닌의 말에 이의를 단다.

"크로닌이 의료에 대해 얘기할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요. 목숨을 살린다는 낭만적인 직업관보다는 많은 환자를 잇따라 봐야 하는 게 요즘의 현실이니까요."

97년 미 뉴욕 국제사진센터(IPC)에서 '아트 클래스'를 수료하고 돌아온 그는 사진이론 분야에도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사진이론서 『사진의 문법』(눈빛·2000), 『의미의 경쟁』(눈빛·2001)을 번역했고 올해말에는 다섯권의 또다른 번역서들을 쏟아낼 예정이다. 그는 새로운 사진운동을 벌이고 있는 갤러리 '스페이스 사진'의 기획위원으로, 시각예술 전문출판사인 눈빛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른바 사진 판에서 어느 정도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그는 "이제 서양식이 압도하고 있는 사진 판에 우리 고유의 사진 시각을 가미하고 싶다"고 말했다. 만나기 전 그를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할지, 의사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림은 이내 명확해졌다. "그래, 맞아 사진작가 김우룡…."

글=신용호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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