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3>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 18.구품연지(九品蓮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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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불국사 복원을 위해 발굴한 지역은 넓었다. 국보 20호인 다보탑과 21호 3층석탑(일명 석가탑)이 서 있는 위치로 오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자하문 좌·우의 복도와 같은 회랑(廻廊)터, 회랑에서 법당인 대웅전으로 통하는 익랑(翼廊), 그리고 대웅전 뒤에 마련된 강당인 무설전지(無說殿址)와 비로전터·관음전터 등 없어진 건물들의 터를 모두 포함하는 광범위한 규모였다.

발굴조사는 순조로워 건물터를 모두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복원설계를 거쳐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불국사 전면 축대 아래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 구품연지(九品蓮池)도 발굴 조사하게 되었다. 구품연지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불국사에 연못이 있었다는 설이 전해졌고 조선시대인 1798년 연못의 연잎을 뒤집었다는 기록이 역사책에 남아 있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막연한 발굴이었다. '연지를 지나 연화칠보교를 통과하면 극락에 이른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보 22호인 연화칠보교 바로 앞에 있을 것으로 판단, 부근을 파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웅전에 오르는 국보 23호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 구품연지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역시 속설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는 믿을 게 못됐다. 발굴조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임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씹게 됐다.

불국사는 과연 우리나라 최대의 관광지답게 수많은 신도와 관광객이 몰렸다. 더구나 별로 넓지 않은 불국사 축대 앞 공간으로는 몰려드는 인파를 수용하기 벅찬데 발굴조사를 위해 이곳을 통제하다 보니 발굴 여건이 이중으로 어려웠다.

당시 불국사 발굴 복원공사에 참가한 조사원들은 필자와 최몽룡(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 대부분 미혼이었다. 김동현 문화재전문위원(현 동국대학교 교수)은 기혼자였다. 하지만 집을 떠나 출장기간이 길어지자 기혼자든 미혼자든 집으로 안부전화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잠은 불국사 내 요사채에서 잤다.

시외전화를 많이 하고 통화시간도 길었지만 전화요금 청구는 한두 통화 값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쌌다. 조사원들은 신나하면서도 뭔가 계산이 잘못됐을 거라고 의아해들 했는데 나중에야 경위가 밝혀졌다. 조사원 가운데 사귐성 좋은 친구가 불국사 우체국에 근무하는 교환양을 사귀었던 모양이다.

당시만 해도 시외전화를 하려면 지역 우체국 교환원들을 서너차례 거쳐야 했다. 서울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불국사 우체국 교환원에게 시외전화를 신청, 교환양이 이를 경주 우체국 교환원에게 전달하면 경주시 우체국 교환, 서울 우체국의 교환 등을 거쳐 통화를 원하는 집으로 연결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시외전화 신청자가 많을 경우 장시간 기다려야 했고 통화료도 아주 비쌌다. 그런 상황에서 통화료가 싼 건 물론이고 신청만 하면 즉시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사원이 사귄 교환양의 '숨은 공'이었다. 문제의 조사원은 교환양에게 스타킹·케이크·꽃 등 선물 공세를 편 모양이었다.

뱀술에 얽힌 추억도 생생하다. 최몽룡은 고등학교 시절 야구를 즐겨 하다 허리를 다쳤는데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꽤 신경을 썼다. 장가도 들기 전이 아닌가. 하루는 허리에 사주(蛇酒·뱀술)가 좋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듣고는 작업인부를 통해 뱀술을 구해왔다. 댓병에 뱀이 잠겨 있는 뱀술을 식사시간에 꺼내놓더니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권해왔다.

뱀술을 보기는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술 빛깔이 맑지 못하고 뿌연게 첫눈에 뭔가 잘못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 걸 왜 먹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어 꾹 참았다.

큰 돈 주고 구입한 뱀술을 두고 끙끙대는 최몽룡이 안쓰럽기도 했다. 본인도 사오기는 했지만 도저히 먹지 못하겠던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선배의 본을 보인다고 소주잔에 한잔 따라 눈 질끈 감고 단숨에 삼켜버렸다. 무슨 맛인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실소하게 되는 코미디 같은 순간이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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