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자백외교 왜 꼬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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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에 북한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일종의 자백외교를 시도함으로써 그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일본인들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고 제임스 켈리 특사에게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놀라운 자백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느 국가도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북한이 자백하기로 한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켈리 특사의 방북 이후에 평양을 다녀온 오버도퍼 전 워싱턴 포스트 대기자에 의하면 북한 외무성 사람들은 켈리 특사가 핵무기 문제를 제기한 그날 밤 한잠도 못 잤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의 자백 결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이처럼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북한이 자백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자백하면 자백하지 않았을 때보다 북한에 더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자백한 결과는 북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유감을 표시하면 대일 수교 교섭의 큰 장애물이 제거됨으로써 상당 규모의 자금이 들어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일본 국민의 감정을 악화시킴으로써 북·일 수교의 전망을 흐리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대미관계에서는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이 알고 있다고 켈리 특사가 말한 후에도 북한이 계속해서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미국과 계속 대립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고, 반대로 그런 사실을 시인하면 1993∼94년 제네바 협상과 같은 북·미 협상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시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도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북한이 예상했던 결과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문제를 다루기 위한 북한과의 협상을 거절한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북한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94년 제네바 합의를 위시해 핵무기 문제와 관련된 약속들을 모두 위반했으며 미국과 세계를 속이면서 핵무기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추진해 왔기 때문에 그 무슨 약속을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과 말로 하는 협상은 의미가 없고 오로지 북한이 실제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북한의 자백 외교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부인했다고 해도 북한에 보다 유리한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북한의 대미관계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부인했을 것이고 미국은 북한이 사실을 감추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계속 압력을 넣었을 것이 확실하다.

북한의 자백 외교를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북한이 사실을 시인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정은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북한 통치자가 하루속히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북·미간의 협상은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북·미 관계가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가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협상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북·미간에 공식 협상이 없다고 해서 협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협상 테이블을 놓고 서로 마주 앉은 것은 아니지만 북·미간에는 이미 협상이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과 미국은 서로 자신의 요구조건을 상대방에게 통보한 상태다. 앞으로의 과제는 양측의 요구조건 가운데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란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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