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후보 단일화 역사]87년 YS-DJ 실패… 노태우 어부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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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대통령 선거사에서 단일화 논의는 중요 이슈였다. 주로 열세 후보들이 선두 후보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단일화를 추진했다.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5·16 이후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정치인들이 해금되기 시작했다. 공화당 박정희(朴正熙)후보에 맞서 야당에서 민정당 윤보선(尹潽善)후보와 국민의 당 허정(許政)후보, 자민당 송요찬(宋堯讚)후보 등 6명이 난립했다. 흐름이 박정희-윤보선 후보 간 맞대결로 굳어져가자 단일화 논의가 탄력을 받아 선거 11일을 앞두고 허정 후보가, 5일을 앞두고 송요찬 후보가 사퇴했다. '군정 종식'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윤보선 후보는 15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이후 야당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다 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차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다. 비록 야권에서 신한당의 윤보선 후보가 앞서간다고 하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군정 종식이란 화두는 여전했다. 선거를 넉달쯤 앞둔 67년 초 윤보선 후보는 민중당 유진오(兪鎭午)후보와의 이틀간 회담 등을 통해 신민당 창당-윤보선 대통령후보-유진오 당수란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역시 1백16만표 차로 패배.

후보 단일화 논의는 20년 뒤인 87년 다시 불붙는다. 민주화세력은 대통령 직접 선거를 쟁취했지만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후보의 분열로 위기에 처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군정 종식을 위해선 김대중으로선 어렵다는 판단이어서 내가 십자가를 메겠다"고 했다. 평민당 김대중 후보도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나 여망을 저버리기는 어려운 것"이라며 대선에 뛰어들었다. 여론의 거센 단일화 압력에도 불구하고 양김은 독자출마를 강행했고 결국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양김이 다시 맞붙은 92년 대선엔 이렇다할 단일화 논의가 없었다. 97년엔 '수평적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후보 간 후보 단일화-공동정부-내각제 개헌 합의가 이뤄졌다. DJP 단일화는 일종의 연정(聯政)이었다. 그간 단일화 논의와 달리 이념·정책적 거리가 있는 후보 간 단일화여서 야합(野合)이란 비판도 나왔다.

이에 맞서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후보와 민주당 조순(趙淳)후보 간에도 단일화가 이뤄졌다. 막판엔 이인제(李仁濟)후보와 이회창 후보 간 대화 움직임도 있었으나 무산됐다.

2002년 재차 단일화 논의가 일고 있다. 이번엔 약세인 집권세력이 강력한 야당 후보를 상대로 단일화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 새로운 양상이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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