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우연한 시선 최영미 지음, 돌베개, 1만원|시인의 눈으로 그림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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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 셋에 '서른이면 잔치는 끝'이라고 선언했던 저자가 미술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출간에 이은 이번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예술작품은 (인생을) 살아온 만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또 신간을 통해 미술 교과서처럼 단편적인 지식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때문에 '그림은 나와는 먼 얘기'라며 성급하게 신간을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의 조각작품부터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 드가나 세잔 등 인상파의 대가들, 20세기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까지 인물 중심으로, 각각 10쪽을 넘지 않는 21개 장으로 구성돼 있어 마음에 드는 장부터 골라 읽기가 편하다. 시인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감각적인 문체도 읽는 맛을 더한다.

긴장을 풀고 부담없이 읽으면 되겠지만 굳이 신간을 요약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역시 '우연'이 되겠다. 신간 제목과 같은 제목을 단 8장에 대표적으로 녹아 있다.

도판으로 실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관찰자(화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델들의 '우연한' 모습들을 담았다. 작품 '연애편지'의 모델이 된 여인의 연출되지 않은 우연한 포즈에서 화가는 진주 귀걸이를 눈에 띄게 묘사해 놓았다. 저자는 반짝이는 귀걸이를 눈을 현혹하는 찬란한, 그러나 덧없는 사랑의 상징으로 읽는다.

색과 빛이 아닌 선으로 승부했던 인상파 화가 드가도 '우연'이라는 키워드로 읽을 수 있다. 감탄할 만한 데생력으로 시시각각 자세를 바꾸는 모델들의 한 순간을 귀신같이 잡아냈기 때문에 드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동영상처럼 살아 움직일 듯하다.

사실은 대가들의 우연적인 시선들은 때때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동성연애자였고, 카라바조는 공공연히 살인을 범했으며, 드가는 평생을 독신으로 일관했던 여성 혐오론자였다는 사적인 사실들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어 재미가 쏠쏠하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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