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보수양당 체제 한국 정치의 위기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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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한국 정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제 냉소를 넘어 거의 환멸·분노에 가까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왜 제도권 정치세력은 뿌리깊은 보수적 경쟁 구조에 함몰돼 스스로 헤치고 나올 엄두조차 못하고 있는가." 한국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작업인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포괄적인 응답으로 씌어졌다.

이 질문은 저자의 표현 거의 그대로인데, 그것은 실은 우리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품어왔던 의문이다. 아니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던져볼 생각조차 않는 질문으로 변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국내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진보학계의 좌장(座長)인 최장집(58·아세아문제연구소장·사진) 고려대 교수가 대중 저술의 형태로 답을 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주목거리다.

더욱이 이 책은 최근 몇년 새 등장한 이 방면의 논의 중 가장 순도가 높다. 그동안 저자가 립셋·토크빌 등 고전의 섭렵을 거친 숙성과정이 묻어나기도 한다.

정치를 통상적인 의미의 정치행위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가 지역갈등·고질적 학벌사회에서 서울 집중현상 그리고 지적·문화적 병폐에 미치는 영향까지를 포괄하는 성찰 때문에 이 책은 정치철학에 가까운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현실정치 개선을 위한 대안 제시 역시 경청할 만하다.

이 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 책이 1998년 대통령정책자문위원장 재직 시절 '사상 검증' 소용돌이 이후 그의 학자로서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텍스트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나남출판,1996) 이후 6년 만의 첫 저술인 이 책을 보니 그의 학자로서의 비판적 판단은 전과 다를 게 없다.

이번 책의 큰 줄기는 제도권 정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보수 양당체제를 어떻게 혁파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국의 정당체제가 구시대 이념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문제들은 새로운 시야를 요구하는데 비해, 한국 정당체제의 틀과 언어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2백7쪽)

정치가 한국 사회의 중심이슈와 갈등을 정치의 틀 안에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이제 현실정치는 젊은층,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뚜렷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때문에 저자는 한국 정치를 위기로 규정한다. 87년 6·29선언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려 지난 15년간 한국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더 나빠지고 있다"고 단정하기도 한다.

오해하면 안된다. 저자가 보수 양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좁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진보적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념적 협애성은 한 사회가 자유롭게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의식의 기반을 박탈하기 때문"(27쪽)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 보수정당이 정치무대를 독점하는 구조는 해방 직후 만들어진 틀 때문이라고 보는 최교수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비례대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바꾸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독일식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그는 지목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청치가 사회의 중심 이슈와 갈등을 포괄하는 중심의 멍석임을 새삼스럽게 환기시켜 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시 한번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민주주의와 마주설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잘 압축한 현대 정치사'이기도 한 이 책은 지난 8월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행한 여섯차례의 특강을 토대로 했다.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히는 이 책은 시민교육 차원에서도 최적이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 지도층이 돌려가며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조우석 기자

wow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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