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까지 갖고 갈 비밀 3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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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저는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 세개 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A씨의 말이다. 그는 "기업에서 자금을 담당하는 사람의 입은 밥 먹는 데만 필요하다. 말을 하는 입이 아니다 "고 덧붙였다.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으나 현대그룹의 자금을 담당했던 전·현직 임원들은 한결같이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회사 자금과 관련해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밝힐 경우의 파문을 우려해서다. 金전사장의 인터뷰를 계기로 대기업 오너와 재무담당 임원의 '함께 살아가는' 관계도 관심을 끌고 있다.

◇입 다문 이영기씨=현대증권 주가조작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이익치씨가 지목한 이영기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한달째 종적이 묘연하다. 가족들도 함께 지방으로 떠난 듯 서울 자택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李부사장과 친한 현대 계열사 임원인 C씨는 "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여파가 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면서 "올 연말까지는 외부와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계열사 사장을 지낸 D씨는 "그는 현대중공업에서 4년 이상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자금을 담당해 주가조작 사건은 물론 중공업의 자금 이동 등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정몽준 후보와 이익치씨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잠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예전엔 대기업들이 비자금을 만들어 정치권 등에 돌리는 것이 경영 활동의 일환이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4대 대선에 나서기 직전인 1992년 초 그동안 대통령에게 준 뇌물 액수를 공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비자금 등 '뒷돈'을 만드는 일은 재무·자금팀에서 해 왔다.

"영업·인사·노무 등을 담당했던 임원들은 최고경영진까지 오르지 못하고 회사를 떠난다. 그러나 재무·경리·자금을 담당했던 임원들을 보라. 대부분 계열사 사장을 지내거나 퇴직하더라도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 "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영업을 오래 했던 B씨의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재무·경리팀은 보안을 생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때로는 이익치씨의 경우처럼 '억울하게 쫓겨났다'고 생각해 오너의 뒤통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

10여년 전 경영권이 창업주에서 2세에게 넘어갔던 모 그룹에선 새 회장이 창업주 때부터 '금고지기'역할을 했던 재무팀장을 퇴직시켰다. 며칠 뒤 그는 2세 회장 앞에 서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창업주의 비자금 내역이 담긴 것이었다. 2세 회장은 결국 돈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김동섭·김태진 기자

don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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