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수 채우고나니 대리투표 '촌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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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2일 오전 10시50분 국회 본회의장.

박관용(朴寬用)의장이 대한민국학술원법 개정안에 대한 전자투표를 선언한 뒤 의장석 뒤편 벽면에 걸린 전광판에 표결 참석의원과 찬성 여부가 표시됐다.

민주당 김희선(金希宣)의원의 이름 앞에도 찬성을 의미하는 파란색 불이 켜졌다.

그러나 이때 의장석 왼편 중간쯤에 있는 金의원의 좌석은 비어 있었다.

이후 진행된 나노기술개발촉진법과 민·군겸용기술사업촉진법 개정안 등 두건의 법률안 표결에도 金의원은 표결에 참석해 찬성한 것으로 표시됐다.

이 순간 金의원 옆자리인 같은 당 박상희(朴相熙)의원이 金의원 자리의 전자투표기에 손을 갖다대다 국회 여직원의 제지를 받는 장면이 취재진에 포착됐다.

의결 정족수 미달로 통과 법률의 효력시비를 겪었던 국회가 또다시 대리투표 논란에 휘말리는 순간이었다.

국회법 제111조는 "회의장에 없는 의원은 표결에 참가할 수 없다"고 규정, 대리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박상희 의원은 "金의원이 전화를 하러 나간 사이 자리에 있는 전자투표기에서 '삑삑' 소리가 나 기계 뒷면을 들여다봤는데 국회 여직원이 '대리투표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金의원은 "전화를 걸러 잠시 자리를 떠난 동안 몇건의 법안에 대해 투표를 하지 못했다"며 "대리투표를 부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전 11시10분쯤에는 한나라당 의석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임인배(林仁培)의원이 자리를 떴는데도 변리사법 개정안 등 서너건의 법률안 투표 결과에 林의원이 참가해 찬성한 것으로 표시됐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상배(李相培)의원은 "林의원이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대신 투표했다"고 대리투표 사실을 시인했다.

대리투표를 한 의원은 이들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나라당 이상희(李祥羲)의원은 "투표기에 지문인식장치를 설치해야겠더라"고 말했고 같은 당 정형근(鄭亨根)의원도 "자리가 비면 대신 해주더라. 문제가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K의원은 장난삼아 옆자리의 전자투표기에 손을 얹었다가 국회 직원의 주의를 받기도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의장실과 사무처 관계자들은 망연자실했다. 의장실 관계자는 "이같은 일이 없도록 직원들에게 철저히 지켜보도록 하는 등 나름대로 대비했었다"며 "의원들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조차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본회의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의원들이 표결 시작 전부터 '안건마다 일일이 가부를 표시하기 귀찮다''전자표결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등 불평을 쏟아냈다"며 "마음이 온통 대선 판에 가 있는 의원들의 해이한 정신자세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남정호 기자

nam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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